‘장단콩 축제’,농가 소득에 효자 되다.-송달용 前파주시장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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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단콩 축제’,농가 소득에 효자 되다.

– 나는 파주인이다 / 송달용 前파주시장 회고록<제9화>-

1999년 제3회 장단콩축제 송달용 파주시장 내외

장단군(長湍郡)은 6.25 전쟁 이전에는 722㎢의 넓은 면적으로 10개 면의 행정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6만 7천명의 인구가 오순도순 평화롭게 농업을 주업으로 하며 평화롭게 살아왔다. 6.25 전쟁으로 피난 나온 장단 주민들은 60여 년이 흘러도 그리운 고향을 지척에 두고 가지 못하는 한과 고된 피난 생활을 해왔다.

장단군의 토질은 마사토로 배수가 잘되어 인삼과 콩을 재배하기 알맞은 토질이다.

콩의 품종인 장단백목은 내가 문산농업고등학교를 다닐 당시, 1913년 우리나라 최초의 장려품종이라는 것을 배워 익히 알고 있었다. 1969년 장단백목은 인공교배를 통하여 육성 보급된 장려품종인‘광교’도 일본으로부터 도입종인‘육우3호’와 교배하여 육성된 품종이라는 것이다.

정부는 우리나라의 콩 생산이 부족하여 외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여서 주민 통제로 인하여 전답이 황폐화되어 있는 민북지역 100㏊를 개간하여 콩 단지로 조성하였다. 경작은 사회단체별 희망에 따라 콩을 재배토록 하였다.

개인에게 경작권을 주지 않은 것은 개인의 신원파악이 어려워서였고 또 사고가 났을 때, 책임질 주체가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개인별 출입경작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단체는 단체장의 책임하에 경작권을 주고 소득도 단체에게 귀속되도록 하였다. 한 3년은 단체별로 잘 운영되었다. 하지만 콩 재배는 파종, 수확, 탈곡이 힘들고 노력에 비해 소득이 적어 슬금슬금 콩밭을 논으로 개간하여 벼농사로 전환되는 일이 생겼다. 콩 재배 단체는 점점 감소했다.

옛 장단군민 땅 소유자들이 출입하면서 군부대와 협의를 통하여 본격적인 출입 영농이 시작되었다. 출입 영농자들은 주로 논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콩 단지는 다시 황폐화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출입 영농하는 이들은 필요에 따라 조금씩 콩 농사를 경작하는 실정이었다.

파주에는 농민 소득을 위한 축제가 없었다. 이에 농민소득을 위한 농산물 축제인‘장단콩 축제’를 개최하기로 했다.

통일촌 주민과 협의를 통해, 옛 콩 단지에 콩을 심고, 콩 경작 지도는 농촌기술센터에 맡기기로 하여 1997년‘제1회 파주 장단콩 축제’를 통일촌에서 개최하였다. 축제에 사용된 콩은 메주의 원료인‘백태’와 검은콩인‘서리태(黑太)’를 주로하고, 현지에서 7kg(한 말)단위로 판매도 했다. 또한 기관단체장과 미군 장교들도 초청하여 메주 만들기, 두부 만들기 도라산 전망대까지 셔틀버스를 이용한 관광 등의 체험 프로그램과 순두부 시식 등을 했다. 축제 관람객들의 식사제공을 위하여 읍과 면단위 별로 부인회를 참여시켜 음식과 특산물을 판매토록 하였다.

한편, 통일촌이 민북지역이라 출입을 하려면 군부대의 통행 승인이 필요했다. 1사단과 협의하여 시에서 요구하는 대로 관람객의 출입을 위해 시에서 셔틀버스를 운영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출입자의 주민등록증을 임진강 검문소에 맡기고 들어가도록 하였으나 나갈 때 보관된 주민등록증을 교부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려 문제가 됐다.

2회 장단콩 축제 때부터는 출입 전에 카드를 만들어 배부했다. 카드에 주소, 성명, 주민등록번호, 핸드폰번호를 기록하여 검문소에 제출하고 들어오면 나갈 때는 그냥 갈 수 있도록 군부대와 협의해 처리하여 주민과의 혼잡을 피할 수 있었다.

‘제1회 장단콩 축제’에는 약 2,000명의 관람객을 예상했다. 그러나 임진강 건너 민통선 안에 들어가는 자체만으로도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서 약 5,000명이 참여했다. 축제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아무런 사고 없이 마무리되었다.

 

파주장단콩축제 콩타작

축제가 끝난 후, 평가회의에서 통일촌 주민들은‘제2회 파주 장단콩 축제’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했다. 일단 콩은 수확을 낫으로 베거나 뽑아서 탈곡하고, 콩을 선별하는 데에도 많은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력이 부족하여 콩 축제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1회로 콩 축제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통일촌 주민과 협의하여 콩 재배를 위해 공동으로 사용할 대형 경운기와 수확기, 탈곡기, 선별기 등을 구입하여 주고 콩 축제를 계속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콩 축제에 출품하는 콩이 장단지역에서 생산된 것인지 아니면 외지에서 들어온 것이지, 혹은 중국산을 국산으로 둔갑하여 판매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임진강 철교검문소와 리비교 검문소에서 군인이 출입을 통제하기 때문에 아무나 자유로이 출입할 수가 없다는 것을 홍보하고 또 외부에서 들어오는 콩으로 축제를 한다면 장단콩 축제의 신뢰가 떨어져 축제를 할 수 없으므로 콩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다는 것도 아울러 홍보했다.

장단콩 축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져 갔다. 참여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여 통일촌에서 하기에는 장소가 좁았다. 무엇보다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어 축제장소를 임진각으로 옮기는 것을 연구, 검토키로 하였다.

2001년11월9일 파주장단콩축제

장단콩 축제를 통하여 장단콩의 명성이 높아지자, 장단콩의 생산지인 통일촌에 두부공장이 세워지고 통일촌을 상표로 한 된장, 간장, 고추장을 생산, 판매하기에 이르렀다. 민통선 이남지역에서도 장단콩을 원료로 하는 순두부집, 두부전골 식당들이 성황리에 영업을 하고 있다.

이제는 임진각에서 콩 축제가 매년 11월이면 개최되고 장단콩 축제에 매년 70만여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소득도 70억 원 이상에 달한다.

특히, 파주 장단콩 축제에서 콩 가격이 매겨지고 결정되어야 전국 시장의 콩 가격이 결정될 만큼 파주의 장단콩 축제의 명성은 높다.

나날이 발전되어 가고 있는 장단콩 축제는 농가 소득에 효자가 되었다.

 

파주장단콩체험장

 

<자료파일 제공 :  도서출판 헵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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