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에 대한 오해

지난 7월27일은 한국전쟁이 휴전된지 65주년이 되는 날이다. 주요 언론사에서는 ‘판문점 선언’을 맞아 앞으로의 전망과 관련 사진을 기사로 다루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도  휴전협정 당시의 사진들을 여러장 게재하였지만 그 중 판문점 사진(연합뉴스 제공)은 일종의 오보인 것 같다.

연합뉴스에서는 판문점 사진을 1953년 휴전협정 장소라고 설명하였지만 평상시 알고 있던 회담장 건물 외형과 전혀 다르다. 아마, 사진 내용 중 아래 부분에 판넬 형태의 건물이 지금의 판문점과 유사해서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에서 각 신문사에 제공한 판문점 주변 사진 – 실제 위치는 미상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식 장소 (판문점, 어룡리)
한국전쟁 휴전협정 조인식 ( 판문점, 어룡리)

휴전협정을 체결했던 장소는 현재 판문점이라고 불리는 곳보다 개성쪽으로 1km 이상 떨어 진 곳이다. 지금은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판문점리로 북한의 관할 구역이다. 휴전협정 이후 지금의 판문점 위치인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 359번지(옛 주소)로 이전 하였다.

현재의 판문점은  군사분계선상 동서 800m, 남북400m 정방형인  ‘공동경비구역 (JSA : Joint Security Area)’에 위치한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산하 인도군 막사와 포로교환 장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판문점의 원래 이름은 ‘널문리’였다. 광활한 구역에 밭과 몇 개의 초가와 주막을 겸한 상가가 있었다. 이 곳이 정전협정 장소로 결정되면서 영어, 중국어 표기가 필요해졌다. 널문은 한자로  ‘판문(板門)’이고 상가를 뜻하는 ‘점(店)’이라는 글자와 합쳐 ‘판문점(板門店)’이라는 이름이 만들어 진 것이다.

‘널문리’의 지명 유래는 여러가지로 전해 진다. 넓은 문짝이 있다고 하고 중국 사신이 이 마을에서 술을 마신곳으로 유명해졌다. 그후 서울과 개성을 오가던 길손들이 잠시 쉬어 가는 곳으로 정착되어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형적으로 보면 사방이 산으로 막혀져 있고 ‘널문리’ 부근만 평지로 되어 있어 ‘넓은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마을 이름이라고 추측된다.

1953.7.27 당시 협정체결했던 판문점 항공사진/ 오른쪽 공모양은 공군의 폭격을 예방하기 위한 애드벌룬이다
판문점 중심으로 촬영된 최근의 구글 위성지도/ 상단의 산악지형과 개성-문산간 도로를 미군 항공사진과 맞추기 위해 90도 정도 우회전 하였다

휴전협상은 미국과 소련의 합의로 시작되다. 1951년 7월에 개성 시가지의 봉래장에서 처음 정전회담을 개최하다가  11월부터 장단군 진서면 판문점으로 회담장소를 옮겼다. 1952년 1월27일 군사분계선을 결정하고 중립국감시위원단을 구성에 합의하면서 1953년 7월 27일 역사적인 휴전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지난 4월   ”판문점 선언’ 에 따라 판문점은 전 세계적으로 관심이 높은 곳이다. 휴전 협정을 조인한 장소가 공동경비구역에 있는 현재의 판문점이 아니라는 것은 미국 측의 자료나 위키피디아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만 지금의 장소가 역사적인 판문점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 하는 우를 범할 수 있을 것이다. <파주이야기 편집자 이기상,pajuiyagi@gmail.com>

 

 

 

3 thoughts on “판문점에 대한 오해

  1. 알려드립니다. 파주이야기의 주장과 다른 내용입니다.

    1. 휴전협정한 판문점 위치

    국가기록원의 ‘E-기록 속으로’라는 특집호에는 현재 판문점이 있는 공동경비구역이 휴전회담을 했던 장소라고 아래와 같이 기술했습니다.

    ” 정전협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 7일 북한 측이 회담장소로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 인근 널문리 주막거리를 제의했다. 유엔군이 이를 수용해 주막집 맞은 편 콩밭에 회담장을 마련했는데, 이 천막이 판문점의 시작이다. 당시 이곳에는 초가 세 채와 주막이 있었는데, 정전협상국 중 하나인 중국의 편의를 위해 널문의 한자 표기인 판문과 가게 점(店)을 합성해 판문점(板門店)으로 쓴 것이 공동경비구역(JSA)의 또 다른 이름이 된 것이다.”

    2. 판문점 지명유래

    에서는 판문이라는 지명은 휴전협정때 만들어진 지명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태종실록과 107년 전 편찬된 생육신 남효온의 문집 「송경록(松京錄)」에 이곳의 지명을 이미 판문(널문)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태종실록 1403년 3월 16일 기사는 임금의 가마가 송림현 판적촌(板積村)에 머물자 의정부가 잔치를 준비했지만, 초례(醮禮, 혼인예식)를 위해 재계(齋戒,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 중이어서 아랫사람들에게 음식을 주도록 했다는 내용이다. 이곳은 훗날 행정구역 개편 때 개경부 송림현에서 장단군 송남현으로 편입되었는데, 송남은 송림의 남쪽이라는 의미였다. 1750년대 초 제작된 군현지도집인 「해동지도」등 몇몇 문헌에 여기를 판적이라 한 것으로 보아 사천강에 널빤지를 쌓아 만든 판적교(板積橋)에서 따온 지명으로 판문평과 함께 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http://theme.archives.go.kr/next/pages/new_newsletter/2017/html/vol_80/sub02.html

  2. 조선왕조 실록의 ‘판문(板門)’ 검색 결과

    1. 문종실록 5권, 문종 1년 1월 18일 무오 7번째기사 / 경기 조전 절제사 김윤수가 좌우도의 마병과 보병을 거느리고 개성부에 주둔하다
    경기 조전 절제사(京畿助戰節制使) 김윤수(金允壽)가 좌우도(左右道)의 마병(馬兵)과 보병(步兵) 3천 4백 36명을 거느리고 개성부 판문평(開城府板門平)에 주둔하였다.

    2. 세조실록 22권, 세조 6년 10월 6일 무신 1번째기사 / 대가가 개성부에 이르니, 기로와 유생이 가요를 올리다
    레와 번개하고 바람 불고 비가 내렸다. 대가가 판문평(板門平)에 이르니, 비가 오히려 그치지 않았다.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권지(權摯)가 대가를 영접하였는데 여러 일이 매우 소홀하였다. 길을 인도하는 자가 늙은이였는데 대가를 진흙 빠지는 곳으로 그릇 인도하였으며 행궁(行宮)의 여러 일이 또 착오된 것이 많았다. 명하여 권지를 의금부에 내리었다. 개 성부에 이르…

    3.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1일 경신 1번째기사 / 상이 판문에서 점심을 들다
    상이 동파관(東坡館)을 떠나 판문(板門)에서 점심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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