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롱산(月籠山)을 지키자는 다짐은 허공으로 -제31화

pajuin7월롱산(月籠山)을 지키자는 다짐은 허공으로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제31화-

바구니에 달을 담은 듯 아름다운 산을 월롱산이라고 하였다. 1972년 내무과장으로 있을 때 모처럼 탄현면 무소 출장을 가는 중에 월롱산을 바라보니 그 아름다운 중턱을 불도저가 굉음을 울리며 태고의 벌건 속살을 드러내며 도로를 만드는 광경을 보았다.

깜짝 놀라 귀청하여 산림과에 확인한 결과 산림과장 전결로 임도(林道)를 허가 하여 준 것이다. 이유인즉 광업법에 의하여상공부에 월롱산 규석광산 신고를 하였고 그 규석광산을 개발하겠다고 신청하여 거부할 법적근거가 없기 때문에 적법하게 허가를 하였다는 것이다.

월롱산 보존을 위하여 허가된 행정행위를 취소할 경우 기 투자된 비용을 보상하여야 할 뿐 아니라 행정소송을 제가할 경우 승소할 자신도 없다. 그래서 월롱산 규석광산 채굴허가가 되었고 월롱면 영태리에서 월롱산 정상까지 전기 동력선을 연결하여 규석을 채취함으로써 월롱산은 파괴되기 시작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월롱산 정산에 올라가면 약200평 정도의 편편한 돌이 깔려 있어 이곳을 마당바위라고 불렀다. 이 마당바위는 월롱산 기슭에 사는 주민들이 명절이나 복날이면 음식을 가져와 먹으면서 풍류를 즐기던 유서깊은 곳이다.

마당바위에서 사방을 바라보면 개성의 송악산, 서울 북한산인삼각산이 눈앞에 와 닿고 봉서산, 감악산, 파평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탁 트일 넓은 교하벌판으로 공릉천이 감돌아 흐르면서 곡창지대를 이루고 석양에 붉게 물드는 심악산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1977년 규석광산 채굴허가 기간이 지나 연장 신청을 하였다.

재허가를 거부할 법적 근거와 별다른 명분이 없어 군사시설보호법에 의한 군부대 동의를 요청하였다. 군부대는 작전상 이유로 추가 채굴에 동의할 수 없다는 통보가 왔다. 당시 나는 부군수였고 허가를 담당한 산림과 보호계장이던 이인희 계장(후에 도의원이 됨)과 협의 끝에 월롱산이 더 이상 파괴되지 않도록 군부대 부동의를 이유로 재 허가를 하지 말자고 약속을 하고 우리가 파주를 지키자고 약속과 다짐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1978년 6월 강화군으로 발령이 나서 전근이 되었다. 월롱산 규석광산을 운영하는 사람은 중앙권력부서에서 근무했던 사람이로 중앙부서와 경찰을 통하여 군수와 보호계장을 엄청나게 괴롭혔으나 강직하고 원칙대로 업무를 처리하는 보호계장은 나와의 약속도 있고 해서 끝까지 재 허가를 거부하였다. 그 과정에서 괴로움을 같이하지 못한 나로서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러나 자기 업무에 가장 강한 것이 공무원이면서, 권력 앞에 약한 것 또한 공무원이다. 결국 외부 압력에 견디다 못해 재허가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규석의 용도가 축소되고 가격의 하락으로 회사는 부도가 났고 월롱산 규석광산은 폐쇄가 되었다. 그간 40여년의 세월이 흘러 당시 조성했던 임도(林道)는 급경사지역을 굽이굽이 시멘트로 포장하여 정상까지 차량이 올라갈 수 있고 월롱산 정산의 유서 깊은 마당바위는 흙 마당으로 변하였고 규석채취의 흔적은 험상궂은 절벽으로 변하여 옛 모습을 찾을 수는 없지만 이제는 접근하기 쉬운 장소로 때때로 시민의 행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나는 월롱산이 우리나라 역사에 깊이 남을 장소인지를 전혀 몰랐다. 조선일보에 실린 조용헌 살롱에서 청태종(淸太宗)과 월롱산성(月籠山城)에 얽힌 역사적 내용의 칼럼을 읽으면서 월롱산에 비석이라도 세워 역사적인 장소로 부각시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조용헌 선생은 묵개(默介)선생의 권유로 월롱산성에 올라 역사속의 월롱산을 되새기며 쓴 글을 여기에 옮겨 보기로 하였다.

 

월롱산은 해발 246m 밖에 안되는 낮은 산성이지만 주변 일대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략 요충지이다. 월롱산성으로 1636년 병자호란때 청태종인 ‘홍타이지’가 서울 입성을 앞에 두고 3일간 머물며 제단을 쌓고 제사를 올렸던 터이다.

왜 서울을 코앞에 두고 한가하게 3일간이나 머물렀을까? 홍타이지는 월롱산성에서 북한산을 바라보다가 죽은 아버지인 누르하치의 모습을 보았다. 북한산 모습이 아버지 문수보살(文殊菩薩)로 보았던 것이다. 아! 문수보살이 여기에 계시는구나! 누르하치는 생전에 자신을 문수보살의 화신이라고 주장했다. 홍타이지는 조선을 치러왔다가 전혀 생각지도 않게 월롱산성에서 죽은 아버지 얼굴을 발견하고 ‘문수’개념을 체득한 것이다.

누르하치는 왜 문수보살을 강조했을까? 그때까지만해도 여진족은 건주, 해서, 야인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민족을 통합하자면 문수보살이 필요하다. 문수는 지혜를 상징한다. 문수는 화엄사상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화엄(華嚴)은‘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 핵심이다. 문수는 통합을 상징하는 인격이다. 여진족 발음으로‘만주(滿洲)’는‘문수(文殊)’라는 뜻이라고 한다. 백두산은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산이라고 여겼다.

당시 30만 인구에 불과했던 여진족이 1억이 넘는 명나라를 먹기 위해서는 인력 보충과 함께 조선·몽골과 연대하는 일이 당면 과제였던 것이다. 전쟁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항복만 하면 죽이지 않고 살려주는 것이 문수보살의 지혜로운 무력행사 방식이었다. 이렇게 해서 여진은 몽골도 통합했다.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인조가 큰절 몇 번 했다고 목을 치지 않고 살려준 것도 이런 맥락이다. 당시 조선은 주자 성리학의 화이관(華夷觀)에 사로잡혀 있었다. 화이관에 따르면 여진족은 천박한 오랑캐였다. 병자로한은‘문수화엄’과‘주자성리학’의 대결이기도 하였다. 월롱산성에 올라가‘만주’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인조대왕은 탄현면 갈현리 장능에 묻혀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