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구리반지 -제70화-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제70화-

송딜영 전파주시장의 결혼식에 촬영한 부모님의 사진

 

어머니께 지난날의 가난했던 이야기를 귀 아프도록 들었다.

태어날 때 가난은 부모의 책임이라는 말이 있으나 어머니의 책임이 아닌데도 늘 자기의 책임인 양 느끼고 계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시고 외할머니는 두 딸을 데리고 생활 능력이 없어 사촌 집에 얹혀 사셨다고 했다.

나는 외할아버지를 보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그분의 행적에 대하여 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살던 야동리 마을은 나지막한 이름 없는 야산을 중심으로 풀무골, 창골, 원골, 두문골의 이름을 가진 네 개의 자연 부락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외할머니는 두 딸이 짐이 되어 일찍 시집을 보내신 것 같았다.

큰딸인 나의 어머니는 두문동에서 산 너머 풀무골 같은 동네로 시집을 보내시고 작은딸은 지금의 파주읍 연풍리 대추벌로 역시 일찍 시집 보내셨다.

그리고 의지할 곳 없는 외할머니는 사촌집에서 일을 하시며 그 대가로 생활을 하신 것이다. 외할머니는 산 너머 큰딸인 우리 집에 자주 오셨다.

하루는 외할머니가 오셔서 건넌방에 걸려 있는 가마솥에 소죽을 끓이면서 나뭇가지를 낫으로 자르시다가 왼손의 동맥을 찍으셔서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피가 멈추지 않자 금촌병원으로 달려가 겨우 피는 멈추었으나 의술의 부족으로 조금만 움직여도 피가 터지고 또 터져서 결국은 그 일로 외할머니는 한 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남편 없이 두 딸을 키우시느라 모진 고생을 다하신 외할머니의 고달픈 인생살이가 한이 되어 몸부림치며 통곡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시집 오셔서 10남매를 낳으셨는데 홍역, 마마(천연두)로 6남매를 잃으시고 나머지 아들 둘 딸 둘 4남매를 기르셨다.

어머니는 가난에 대한 고통과 불평이 많으셨지만 내색은 하지 않으시고 4남매를 키우는데 온 정성을 다하셨다.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이른 봄이면 쑥을 뜯어 곡식을 조금 넣고 쑥개떡을 만들어 배를 채우고 하루하루를 보냈고 그것도 모자라 보리이삭을 미리잘라 허기를 면하던 보릿고개 이야기를 하실때는 눈시울을 붉히셨다. 말 그대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생활을 한 것이다. 하루는 어머니의 작은 소원을 나이 어린 나에게 하소연하시듯 말씀하셨다.

우리 집 바로 위에 아버지와 사촌간이고 나에게는 당숙(5촌)인 큰댁이 있었는데 그 당숙은 일제 강점기에 아동면 면장까지 지내신 분이라 파주군의 큰 유지셨다. 설날이 되면 사과나 배 등이 선물로 들어온다.

어머니는 사과나 배가 선물로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부러우셨는지 나를 보고 우리 집은 언제 저런 선물을 받아 볼 수 있을까? 하고 말씀하신 것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가슴에 남아 있다. 나는 초등학교 때는 축구선수 고등학교 때는 배구선수로 운동을 참 좋아했다.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땀을 흘리고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집 뒤뜰의 우물에서 냉수를 뜨시고 맹물만 마시면 갈증이 더해진다고 하시며 냉수에 간장을 약간 넣어 주시곤 하셨다. 어머니는 온 집안 대소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

특히 종가인 큰댁 일이라면 우리 집 일을 제쳐 놓고 참여하셨다. 추석날에는 식구가 모두 앉아 송편을 만드는데 어머니는 큰댁의 추석날 제사 준비를 다 마친 다음에 밤늦게 집에 오셔서 그때부터 우리 집 송편 반죽을 하고 온 식구가 송편을 만들기 시작해 새벽 3시까지도 못 다 마치면 지루하기도 하고 피로와 졸음이 밀려와 송편의 소를 없애기 위해 손바닥만 하게 크게 만들어 찌기도 했다.

지금도 밤새워 송편 빚던 어머니의 생각이 난다. 내가 대학시절 가정교사로 들어갈 때 침구를 머리에 이시고 금촌역까지 배웅을 나오시면서 남의 집에서 건강 조심하고, 아이들 잘 가르치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떠날 때 눈물을 흘리시며 기차가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자식이라면 끔찍하게 여기시던 인자하고 따뜻한 어머니의 마음씨가 그리워진다.

내가 경기도청에 취직을 하였을 때 온 동네 사람에게 자랑을 하시고 지나가는 사람까지 붙들고 이야기하며 기뻐하셨다고 한다.

어느 날 파주 시골집에서 도청으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동네 잔칫집에서 국수를 잡수셨는데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하시더니 숨이 막혀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20여 년 동안 감기 한 번 앓아 보신 적 없는 아주 건강한 분이셨다.

그날로 파주 집에 내려와 병원에 가보자고 하였으나 지금은 괜찮은데 왜 돈을 버리고 병원에 가느냐고 거절을 하셨다. 그 후 매주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면 나와 아내는 같이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아무 일 없다고 하시던 어머니는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소화를 돕기 위한‘가성소다’를 매끼 식사 후에 드셨다. 그러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더욱 통증은 그 정도가 점점 심해져 갔다.

통증을 참을 수가 없어 병원에 가는 것을 거절했던 어머니 스스로 서울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 보았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서울 단칸방 우리 집으로 모셨다.

마침 서울 수도 병원의 암의 권위자이신 고광도 박사가 신당동 우리가 사는 이웃에서 대학교 수업과 병원의 진료가 끝나면 자기 집에서 환자를 진료했다. 우선 고광도 박사 집에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진단을 받았다. 고 박사는 진단을 하고 난 후에 나에게만 암이 70~80% 틀림없으니 일요일과 월요일 아무것도 드시지 마시고 공복으로 수도병원에서 X-Ray를 찍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고 했다. X-Ray를 찍은 결과는 위암 3기가 넘을 정도라고 했다. 그 당시 암이면 치료불능의 불치병이었다. 청천벽력에 세상이 캄캄했다. 지금까지 많은 고생을 하신 어머니를 편안히 모시지도 못하고 이제 효도를 할 만하니까 세상을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 너무나 충격이었다.

고 박사는 수술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수술을 해서 완쾌된다고 장담할 수도 없으며 수술을 하면 그 고통을 참아야 하고 두 번 돌아가시는 격이니 잘 검토해서 결정하라고 했다. 형님과 상의를 했다. 완치되지 않는다고 하면 두 번 고통을 드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 박사는 생각 잘했다고 하며 잡수시고 싶은 것 많이 사 드리고 보고 싶다고 하는 것 다 보여 드리고 본인이 해달라고 하시는 것 모두 해 드리면서 마지막 효도를 다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통증을 감소시키는 진통제와 그 외에 몇 가지 약을 주었다. 어머니에게는 의사선생님이 이 약을 잡수시면 병이 낫는다고 하시였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렸다.

고광도 박사에 따르면 6개월을 넘기시기가 어렵다고 했다. 시골로 내려가시기 전에 마침 국도극장에서 성춘향의 영화 상영이 있어 영화를 보여 드리고 생전 처음 가보신다는 남산에 올라 서울 구경을 시켜 드렸다. 하자는 데로 따라 다니셨지만 몹시 괴로움을 참으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파주 시골로 내려오셨다. 시간이 흐를수록 통증은 점점 심해져 갔다. 누구에게 들으셨는지는 몰라도 교하면 오도리에 피천득이란 한의사가 있는데 그 한의사가 유명하다니 거기에 가봤으면 좋겠다고 하시여 일요일 피천득 한의사에게 모시고 갔다.

한의사는 진단을 해보고 이 병은 취적(피가 한데로 뭉쳐진 것)이라고 하면서 환약을 해드릴 테니 이것을 잡수시면 나을 것이라고 하며 어머니에게 위로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어머니는 평소 농사일 하시느라 여자로서의 화장이나 반지도 한 번 끼어 보시지도 못하시고 모양을 내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어머니께서 어느 날 금반지를 끼고 싶다고 형수님에게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형수님이 금촌 장날 장터에서 파는 구리반지를 사서 끼워 드렸다고 한다. 그 구리 반지도 참 좋다고 하시며 기뻐하셨다고 했다. 왜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2~3돈짜리 금반지면 충분한 것을 그 금반지가 얼마나 된다고 차일피일 하다가 금반지를 못해드렸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는 1961년 5월 29일(음) 64세를 일기로 구리반지를 끼신 채 한 많은 이 세상을 뒤로 하시고 돌아가셨다.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금반지를 해드리지 못하고 구리반지를 끼신 채 돌아가시도록 한 죄책감과 불효자식이란 생각이 늘 뼈에 사무치게 후회가 된다.

어머니!!

어머니가 그토록 잡수시고 싶고 부러워하시던 사과, 배, 귤까지 이제는 우리 집에도 선물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늘 자랑하시던 며느리와 둘이서 직장도 열심히 다니면서 일하고 절약하여 셋방살이 전셋집이 아니라 떳떳한 우리 집도 자가용 자동차도 장만했습니다. 손자 손녀도 건강하게 잘 자라서 결혼도 하고 아들딸 낳고 잘 살고 있습니다.

저도 직장에서 열심히 일해 어머니가 바라시던 아들로서 시장, 군수가 되어 사회적인 지위도 얻고 고향 파주 발전을 위해 한몫을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그 따뜻한 손을 놓고 헤어진 지도 어언 53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새 내 나이 팔십이 넘었는데도 구리반지만 생각하면 후회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어쩌다가 어머니께서 여자로서 평생 처음 갖고 싶어 하시던 금반지를 해드리지 못하고 구리반지를 끼신 채 이 세상을 떠나시게 하였는지 그 불효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엎드려 비옵나이다.

<자료파일 제공  도서출판 헵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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