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덕분에 잘 노라씨다

pajuin7

‘강화’ 덕분에 잘 노라씨다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제49화-

1976년, 강화군 전적비(戰績碑) 정비사업이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추진되면서 나는 강화군 부군수로 가는 것이 확실시 되었으나 이 소식을 들은 강도희 신임 파주군수의 반대로 파주군에 재직해 있다가, 1978년 6월 13일, 결국 강화군 부군수로 발령이 났다. 이래저래 강화군과는 인연이 있는 것 같았다.

1978년, 전국적으로 극심한 가뭄이었지만 파주군은 6월 13일 강화 부군수로 부임할 때는 수리시설이 잘되어 있어서 천수답을 제외하고는 95% 이상 모 이앙(移秧)이 되었다. 그러나 강화군은 30% 정도밖에 모 이앙을 못하고 논이 바짝 마른 상태였다.

섬이라서 그런지 땅을 파도 도대체 물은 나오지 않고 짠물뿐이었다. 강화도 주변은 물은 많으나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바닷물이 전부였다. 그해 6월 24일 하지가 지나서 모내기에 흡족한 양의 비가 내렸고 계절적으로 빨리 모를 심어야 하기 때문에 강화군에서는 인력지원을 도에 요구하여 타 시·군의 주민을 동원했다. 김포군, 고양군, 안양시 등지의 주민이 자원봉사를 온 덕분에 7월 4일까지 모 이앙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고생만 했지 그해의 수확은 거의 없었다.

파주군에 있을 때에는 통일로 정비사업, 기지촌 정비사업, 적가시(敵可視) 지역사업 등 매일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나 강화군은 특수사업이 거의 없어 여유로웠다. 아침에 출근하여 오전 중이면 사무를 다 마치고 오후에는 읍·면별로 부락을 순회했다. 강화군의 지리도 익히고 마을 이장을 만나 주민과 많은 이야기도 나누며 거의 매일 주민의 숙원사업이 무엇인지 확인하러 다녔다.

하루는 월요일에 출근하여 오전 일을 마치고 오후에는 차를 타고 출장을 가는데, 운전기사가“덕분에 어제는 잘 노라씨다.”라고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 말이 귀에 몹시도 거슬리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게 반말을 하는 것 같았고 그 한편으로는 텃세를 부리는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잘 노라씨다’는 강화에서만 쓰이는‘잘 놀았습니다’라는 의미였다. 그 방언의 유래가 어디에서부터 나왔을까? 궁금했다. 나는 강화에서 출생하여 교육계에 오래 계셨던 강화군의 김종환 교육장에게 그 어원을 물어보았다.

원래, 강화도와 교동은 섬이라 조정 대신이 죄를 지으면 강화도나 교동으로 임금이 귀양을 보냈다. 어제까지는 조정 대신 양반이었으나 오늘은 죄를 짓고 귀양을 온 죄인인지라, 공대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반말을 할 수도 없고 해서 어물쩍하게 생긴 중간 말이 아닌가 라고 김 교육장의 설명이었다.

그랬시다(그랬습니다), 그래시겨(그렇게 하세요), 먹어시갸(먹었습니다), 안녕하시갸(안녕하세요), 오셨시꺄(오셨습니까) 등이 다 그렇게 해서 생긴 것 아닌가 싶다고 했다.

나는 강화군에 근무하면서 강화 사람들의 절약하는 생활 태도에 큰 감명을 받았다. 강화군은 옛날에 풍년이 들면, 한 3년 농사를 짓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었으나 한 해가 가물면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가뭄이 드는 때를 대비하여 평소 절약하고 알뜰하게 생활하는 습관이 그들의 몸에는 배어 있었다. 그래서 장가를 가려면 강화 색시를 얻으라는 말이 있다.

 

강화군에는 그 옛날, 직조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여름에는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는 온 가족이 비단직조공장에서 비단을 도매로 구입해 육지로 비단을 팔러 다녔다. 농한기인 3개월 동안 장사를 하면 3개월분의 쌀도 절약되고, 장사로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강화에 근무하는 동안, 나는‘세 가지의 아닌 것(三不)’을 깨달았다.

첫째, 강화는 섬이면서 섬이 아니고,

둘째, 물(바닷물은 먹을 수도, 농사를 지을 수도 없다)이 많아도 물이 아니고,

셋째, 논이면서 논(가뭄이 들면 물이 없어 농사를 못 짓는다)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강화인들은 강인한 정신력으로 모두 극복해 냈다. 강화를 잘 사는 지역으로, 수도권의 관광 명승지로 만든 그들의 불굴의 정신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참모회의에서 군수가 청사 신축을 공식 선언하고 공개적으로 믿을 만한 업자를 골라 수의계약을 추진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군수와 재무과장은 군 청사를 새로 짓기로 협의하고 특정 업체까지 이미 지정한 상태인 것 같았다. 군수는 참모회의에서 재무과장에게 수의계약이 가능한지를 물어보았다. 재무과장은 이에 수의계약을 하려면 서정쇄신위원회(庶政刷新委員會)의 결의를 받아야 가능하다고 하였다.

서정쇄신위원회는 감사계 소관으로 위원은 실과소장(室課所長)으로 구성되어 부정부패 방지대책을 수립, 심의하여 정책 방향을 의결하는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나는 재무과장의 의견 제시에 반대하고 나섰다. 서정쇄신위원회가 회계법상 규정한 법률을 초월할 수 없고, 동 위원회에서 의결했다

하더라도 수의계약 요건을 구비하였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다음 날, 참모회의에서 군수와 재무과장이 어떻게 의논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군수가 모든 업무는 소신을 가지고 추진해야 한다면서 감사계장을 불렀다. 그 자리에서 서정쇄신위원회를 개최하고 수의계약에 대한 가부를 결정하라고 준엄하게 지시하였으며 가부에 대한 서명 날인을 그 자리에서 하도록 하고 군수가 가(可)에 서명을 먼저하고 서면을 돌렸다.

그날 내무과장은 삼산면 출장으로 불참한 가운데 표결 결과는 부결이었다. 군수는 표결한 장부를 내동댕이치고 군수실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군 청사 건립은 1차로 거부되었다.

 

강화도 화도면 마니산의 첨성단

나는 군수의 지시에 정면 반대를 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 관내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와 솔직하게 말을 하려고 군수실로 들어갔으나 군수는 없었다. 대신, 출장 갔던 내무과장에게 재무과장이 아침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다른 과장들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부결에 동의하느냐고 불평의 말을 듣게 되었다.

나는 재무과장에게“당신이 군수인가? 이번 일만 해도 내게 한 번이라도 사실을 말한 적이 있나? 경리계장을 통하여 모든 것을 지시하면 경리계장이 당신의 지시사항을 내게 보고하는 체계였는데 그것이 과연 잘한 일인가?”라고 따졌다. 그리고“나를 당신의 부하같이 생각하는 모양인데, 과연 그런가? 내가 파주 사람이라고 텃세를 부리는 것인가?”하고 물으며 대답을 재촉했다. 재무과장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날 오후 늦게 군수를 만났다.

“아침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상사를 모시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상사가 지시하면 무조건 따르는 것이며, 또 하나는 지시사항이 적법한가를 잘 검토하여 바르게 모시는 방법입니다. 저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정말로 수의계약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내 물음에 군수는 그렇다고 답했다.

“정 그러시면 저도 군수님의 의견에 동의하겠습니다.”

나는 더 긴 말은 하지 않고 군수실을 나왔다. 경리계장에게 군수의 뜻을 전하고 그대로 실행하라고 했다. 경리계장은 자신이 죽어도 할 수 없다는 그의 말에 나는 알아서 하라고 했다.

12월 초, 관내 출장을 갔다가 돌아온 어느 날이었다. 청사가 좁아 회의실의 일부를 쓰고 있는데, 직원들이 책상을 옮기고 한쪽에서는 회의실을 개수하느라 야단법석이었다. 회계법상 동일한 장소에 두 개 업체가 들어갈 수 없다는 규정을 악용하여 먼저 회의실 개수 작업을 한 업체에게 군 청사 전체를 수의계약으로 주기 위해 급하지도 않은 회의실 개수공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군수에게 말한 바도 있어 나는 그대로 두었다.

6개월 만인 1979년 2월 1일자로 통일로 주변 주택개량사업 때문에 강화군으로 발령난 지 6개월 만에 나는 파주군으로 다시 발령이 났고 경치 좋고, 인심 좋고, 먹거리 다양한 강화를 뒤로해야 했다.

나는 승진도 못하고 일만 하는 호구인가? 싶은 생각이 스쳤지만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고 다 내 팔자라고 웃어넘기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을 떠나올 때, 군수가 원하는 대로 나는 경리관으로서 수의계약 서류에 도장을 찍고 왔다. 1개월 후에 재무과장도 파주군으로 발령이 났다.

강화군 직원들 사이에서 재무과장이 강화에서 송 부군수를 괄시하였으니, 파주로 가면 읍·면장으로 갈 것이라고 소문이 났다. 그러나 나는 파주로 온 재무과장에게 친절하게 현황 설명도 해주고 군수와 협의하여 사회과장으로 발령을 냈다. 뭔가 느끼는 바가 있기를 바라면서.

얼마 후, 강화군에서 전화가 왔다. 감사원 감사를 하는데, 당시 부군수와 재무과장을 감사원이 소환했다는 것이다. 재무과장과 함께 강화군으로 가는데 그는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했다.

나에 대한 감사는, 감사관이 문안 작성과 답변까지 동의를 구하면서 쉽게 끝났다. 아마 사전조사를 통한 여론을 들은 것 같았고 재무과장으로 오랜 시간 동안 문답서를 받았으나 징계 없이 경고로 끝났다.

지금의 강화청사는 그러한 복잡한 과정들 속에서 옥동자로 태어났다.

마니산에 오르면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본 듯이 강화의 넓은 벌판과 확 트인 바다 너머의 인천 광경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겨울 동어(숭어새끼)에 소금을 솔솔 뿌려 구워 소주 한 잔 걸치는 맛은 또 어떤가? 강화의 순무깍두기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짧은 동안 머물렀지만, 강화에서의 시간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자료파일 제공  도서출판 헵시바>

‘나는 파주인이다’ 목록으로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