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나루 역사, 사실로 증명되다

Last updated on 2019-06-05

임진나루에 대한 역사 기록이나 설화는 많이 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 된 적이 없었다. 파주시가 지난 3월부터 실시한 임진나루 발굴 조사로 성문지  기초석과 임진진 성곽 일부가 발견되어 파란만장한 임진나루의 역사가 고증됐다.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홍예를 받친 기초석, 통로에 깐 대형 보도석,  측벽석이 출토됐다. 또 문  기둥을 설치하기 위해 구멍을 낸 문확석과 임진진 성벽 일부가 발견 되었으며 진서문터는 너비가 4.55m, 길이 7.4m로 다른 지역보다 규모가 더 큰 것으로 알려졌다.

발굴지는 사방 10여m 정도 규모로 지표면 보다 4m 이상 낮은 곳에 진서문의 기초가 발견 되었고 현재의 강변보다 낮아 보였다. 설명에 따르면 1900년대 산림이 황폐화 되면서 토사가 임진강에 유입되어 강 바닥이 높아져 상대적으로 진서문 터가 낮아 졌다고 한다.

진서문터 기초석과 보도석이 현재까지 보존 된 것은  6.25 전후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연병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 곳을 매립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진서문터가 흙으로 묻혀 있어 홍수 유실에도 보호되고 인근 주민들이 건축 자재로 사용하는 것을 방지하게 되었다고 본다.   1990년대말 광탄면 용미리에서 발견된 혜음원지 주변 민간 주택에서도 혜음원지 장대석을 이용해 툇마루 발판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발굴지 하류 방향 절개지 벽면 쪽에는 임진강의 홍수나 범람으로 오랜 세월동안 침수되었던 여러  퇴적층의 나이테가 보였으며 진서문 좌우의 산악쪽으로 성벽터가 발견됐다.

그 동안 문헌으로만 알려졌던 임진나루가 이번 발굴로 진서문의 위치와 축조 형태가 알려지게 됐다. 발굴지 주변에서 고려시대 기와편도 발견 되었기 때문에  진서문 성문터  하단 부분에는 삼국시대나 고구려 시대의 흔적도 있을 수 있다고 추정된다.

벌굴 결과 설명회에서  (재) 한백문화재연구원  서영일 단장은 고려시대에 지금의 서울에 남경을 만들면서 적성· 연천 방향의 장단나루 중심 연결도로가 개성과 직선 거리가 가까운 임진나루 방향으로 이전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삼국시대에 연천 호루고루성과 칠중성을 중심인 장단나루에서  신라군과 고구려군 사이에 많은 전투가 있어 북방과 남방을 연결하는 요충지로 알려져 있다.

임진나루에는 영조 때인 1755년 군진인 임진진이 설치됐고, 나루 안쪽 협곡을 가로지르는 성벽을 쌓으면서 낸 문이 진서문이다. 석조 홍예 위에 지은 목조 누각을 임벽루(臨壁樓)라고 불렀다.

임진진은 임진강 남쪽에 설치한 강변 시설로, 북쪽 장단나루와 함께 교통 요지로 조선시대 국도 1호선과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중국의 사신들이 장단 숙소에 머물면서 임진강 풍광을 즐겼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임진왜란시 선조는 왜군을 피해 북녘으로 피신하면서 한밤중에 빗속에서 임진나루를 건넜고 임진나루 북쪽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임진서문'(臨津西門)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있는 ‘경강부임진도’와 김홍도 아들 김양기가 그림에 잘 남아있다.

파주시는 앞으로 진서문 발굴지를  국가문화재로 등록하고 진서문의 복원을 위해 확장조사를 실시할 계획이지만 대부분 시굴이 완료되면 발굴지 훼손을 막기 위해 다시 흙을 채워 발굴전 상태로 복구하게 된다.

이번에 임진강가에서 모처럼 발견된 역사적 유물을 성급하게 복구하는 것은 훌륭한 관광자원을 덮는거나 다름 없는 것이다. 임진나루 주변은 평화누리길, 율곡습지, 율곡수목원, 감악산 출렁다리를 찾는 관광객이 37번 국도를 통과하는 길목이다. 임진나루를 관광객에게 공개할 수 있도록 한시적인 비가림과 관람 시설 설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옛부터 역사가 많은 지역이라는 것은 그 만큼 살기가 좋은 곳 이라는 것이다. 그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면 더 많은 스토리가 새로 만들어지고 그 이야기의 현장을 찾아 오는 순기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이슈 파주이야기 편집자 이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