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람 -전현자-

 

어느새 사월이다. 살구꽃과 라일락이 피는 계절, 겨우내 움츠렸던 몸과 마음에도 활기가 돈다. 작년 말 급하게 이사한 회사 사무실도 자리를 잡아서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지인과 함께 나들이를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딸 하나인 내가 사위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집도 아들만 하나라 앞으로 걱정이 많다고 한다. 결혼을 잘 시켜야 한다는데 의견이 같지만, 요즘은 자신의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결혼 하더라도 이런 저런 이유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은지라 부모들은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예전에 이런 사람을 점찍고 있었노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마침 그녀도 아는 사람이었다. 자기 회사 담당자여서 업무능력은 물론 사람 됨됨이 까지도 훤히 알고 있었는데 세상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 전, 오후 네 시가 넘었는데 급히 은행 업무를 볼 일이 생겼다. 거래 은행의 분점이 근처여서 다행이라 여기며 부랴부랴 가니, 영업시간이 끝났다. 네 시 반까지 하는 곳도 있어 착각한 것이다.

머뭇거리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건너편 창구에서 나를 부른다. 지점에서 근무하다 온 사람 덕에 무안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고마운 마음으로 청구서를 건네고 기다리다가 옆자리 직원과 눈이 마주 치는 순간, 서로가 놀라워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를 만난 것은 칠 팔 년 전이다. 은행에 갔더니 담당자가 바뀌었다. 인사이동 때나, 갑작스레 바뀌는 경우, 첫 대면이 어색한데 얼른 봐도 낯설지가 않다. 반듯한 인상에 업무가 빠르고 고객을 대하는 태도에 진심이 담겨 있다. 말투나 몸가짐도 공손하여 마음에 들었다. 한 번은 지점장이 직접 손을 잡고 칭찬 하는 걸 보고 더욱 믿음이 갔다.

그 무렵 딸아이가 임용고사 준비 중이어서, 도서관을 드나드는 처지라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내게는 하나 밖에 없는 귀한 딸이지만 세상의 기준에는 좀 못 미치는 취업준비생이다. 스무 살 중반이 되자 그 또래 청년들의 품새며 언행을 요모조모 살피게 된다. 훤칠한 젊은이가 지나가면 놓칠 새라 뒤돌아보기도 하고, 청첩장을 받으면 부러운 마음이 앞선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앞으로 어떤 사람을 만날지 걱정이다.

나 혼자 서둘 일이 아닌데도, 사람이 워낙 좋아 보여 딸아이를 견주어 보며 어떻게 말을 꺼내볼까 궁리하게 된다. 착하고 정직하며 분별력 있고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다고 좀 과장해서 말해볼까, 지금은 내세울 것 없지만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니 기다려 달라고 은근히 말을 붙여보나, 합격만 하면 그에게 뒤질 것도 없을 텐데 등, 은행을 드나들 때마다 마음속으로 온갖 생각을 했지만 끝내 꺼내지도 못하고 시간만 흘렀다.

얼마가 지났을까. 말없이 그가 전근을 갔다. 전임지를 알아 볼 수는 있지만 그럴 일은 아니어서 안타까운 마음만 컸다. 눈앞의 보물을 놓친 듯 한동안 허탈했다. 언젠가 딸아이에게 그 말을 했더니 어떤 사람이기에 그토록 맘에 들었냐고 궁금해 한다. 혼자서 김칫국을 한 동이나 마셨으니…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민망하다.

2016.8월 일본 나오시마섬, 포스토 이기상

몇 년이 지나서 딸아이는 원하던 직장을 얻었고, 선하고 좋은 품성의 사람을 만나 결혼도 했다. 더러 그의 생각이 스치긴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예기치 않게 마주쳤으니 옛일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그는 내가 엉뚱한 생각을 품었으리라는 걸 꿈에도 알지 못 할 것이다. 짐작 컨데, 좋은 사람 만나 가정을 꾸리고, 직책을 보니 인정받는 것 같아 더욱 듬직해 보였다.

나들이에서 돌아오는 길, 우리는 공통된 화제로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더구나 그녀가 사업상 어려울 때 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 그렇지, 업무능력 뛰어나고 성품도 좋은데다 인정까지 있다니 사람을 제대로 보았구나 싶어 뿌듯하다.

이젠 말없이 떠나도 괜찮은데 이것도 인연이니, 과자라도 구워들고 서둘러 찾아봐야겠다. 당사자들은 제쳐두고 욕심만 앞세워, 괜한 애를 태웠으니 엄마라는 이름으로 이해해 주려나. 닿지 않은 인연과 알 수 없는 인연에 대해 생각이 많았던 사월이다.

 

전현자(탄현)
파주문학회 회원
플레이북 이사
파주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