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우당에서의 소소한 행복 -전현자-

요즘은 날씨가 이상해져서 봄인가 싶더니 장마인 양 비가 자주 내린다. 이런 날엔 뜨듯한 방바닥이 제격이다. 서둘러 마당에 있는 황토방으로 간다. 눅눅한 습기도 제거할 겸 가마솥 걸린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나무 타는 냄새가 사방으로 퍼지고 물이 끓으며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방문을 열면 고목이 된 살구나무가 보인다. 봄이면 꽃샘추위도 아랑곳없이 연분홍 꽃망울을 터뜨리고 만개한 뒤엔 난분분 날리는 풍경이 흰 눈이 오는듯 하다. 이를 아는 지인이 황토방의 이름을 짓고 당호까지 써주었고, 또 다른 분은 살구꽃이 새겨진 전각을 만들어 주었다. 획은 야무지고, 작은 돌 속에 섬세하고 앙증맞게 새긴 솜씨가 돋보인다. 인품은 물론이고 서예와 한학에도 밝아 여러 모로 도움을 받는 처지다. 그리하여 살구꽃이 눈처럼 내리는 집, 행우당杏雨堂이 되었다.

당호에는 옛 사람들이 큰 뜻을 품거나, 세상 밖으로 은거하여 유유자적하는 삶의 철학이 담겨 있다. 좌우명이기도 하고 살던 곳의 지명을 쓰기도 하며 스승이나 친구들이 지어 주기도 한다. 뜻밖에도 수십 년 된 나무 덕에 당호를 얻게 되어 한편으론 고맙고 한편으론 분수에 넘친다는 생각을 한다. 다만 혼자서 누리는 소소한 행복이니 그것으로 족하다.

몇 년 전, 딸 결혼을 계기로 오래 살아온 집을 수리했다. 시멘트 대신 황토로 방바닥을 가득 채우고 벽에도 황토를 발랐다. 수백 년 써도 닳지 않을 장판은 들기름 먹인 종이로 바꿨다. 모양내어 짜 맞춘 베란다의 나무는 날이 갈수록 색감은 짙어지고 햇볕에 바래며 자연스럽게 변해갈 것이다.

마당에는 작은 황토방을 들였다. 구들을 놓고 쪽창을 내고 안팎으로 황토 벽돌을 쌓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방에 대한 애정과 기대를 키웠다. 넓은 아파트에서 자기 작업실을 갖고 있는 지인들이 몹시 부러웠는데, 작으나마 책을 정리해 놓으면 이게 나만의 서재가 되겠지 하는 생각에 웃음이 흘렀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겨울, 아궁이에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리라.

기다리던 방이 완성되었다. 긴 굴뚝으로 연기가 솟고 불길은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구들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들기름을 먹인 장판은 기름이 종이에 스미면서 빚어내는 색이 곱다. 나무판으로 책꽂이를 만들고 흩어져있던 책들을 모아놓으니 그럴싸하다. 찻상 앞에 앉아 물을 끓이면서 새삼 이 공간에 고마움을 느낀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심리적이나 공간적인 거리가 필요하다. 동물들은 종류와 크기에 따라 먹이활동을 하는 최소한의 물리적 공간이 있어야 한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사람 또한 심신을 내려놓고 편히 머물 수 있는 곳이 한 곳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늘 함께 있다 보면 좋은 사람도 허물이 드러나기 십상이니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지혜의 거리를 헤아려본다. 적당한 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눅눅했던 방이 보송해지면 아랫목에 몸을 누인다. 불길이 센 아랫목은 거무스름하게 변했지만 편백나무 향이 코끝을 스치고 뜨끈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진다. 복잡했던 생각들이 가지런해지고 아껴 두었던 차 한 잔에 피로도 눈 녹듯 한다. 숙면을 취하게 되는 것도 황토방의 덕이리라.

방 밖으로 사계가 흘러간다. 봄이면 잉잉거리는 벌들의 날갯짓에 은은한 꽃향기가 맴돌고 여름이면 무성한 이파리와 열매가 자란다. 누렇게 익은 열매로는 맛있는 잼을 만들어 주변에 나눈다. 가을이 되면 단풍이 물들고 창문 너머로 영롱한 풀벌레 소리가 들리면 알밤이 투두둑 떨어지곤 한다. 겨울이면 굵은 몸집으로 당당히 서서 행우당을 지키는 것 같아 마음 든든하다. 창문에 비친 나무 그림자가 계절을 달리하며 수묵화가 되는데 앙상한 가지라도 운치가 있다. 눈이 소담스럽게 내리는 날엔 그리운 친구라도 올 것 같다. 달빛에 기러기 소리 낮게 들리면 세월이 가는 소리도 듣는다.

‘인간은 땅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영향뿐만 아니라 그 땅으로부터 받는 감수성이 있으며, 한 번 어떤 터와 인연을 맺으면 그 터는 인간화되고 인간화한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떠올린다. 양지바른 언덕, 몇 그루의 나무가 있고 철따라 살구꽃, 함박꽃, 백합, 라일락이 연달아 핀다. 군불 지핀 행우당에서 등불 돋우어 책 읽고, 빗소리 벗 삼아 차를 마시고, 오가는 계절의 풍경을 내다보며 그런대로 내 삶을 이어가고 싶다.

<원제 : 행우당 杏雨堂에서 >

 

전현자(탄현)
파주문학회 회원
플레이북 이사
파주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