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선생은 가난뱅이가 아니라 부자였다.

 

율곡은 정말 가난하게 살았을까?

율곡선생에 대한 현세의 평가는 청렴과 가난을 꼽는다. 훌륭한 정치가이며 학자이기에 그 청렴함과 가난은 더욱 빛났다. 이에 대해  학계와  연구가들은 아무런 의심도 회의도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율곡은 사후  제자들이나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필요이상으로  신격화되어고 청렴함과 가난함으로 과장되고 왜곡된 부분이 많다.

후대의 기록에는 율곡은 식솔들과 형제들까지 먹여살리느라고 늘 가난했으며 굶주렸다고 한다. 율곡은 스스로도 가난하다고 했으며 당시의 문인,정치인들이 율곡의 가난함을  학자의 청렴함으로 칭송했다.

 

우선  율곡선생과 동시대에 살았으며 율곡을 직접 만나고 온 허봉(1551~1588의) 의 기록을 보자.

대체로 이숙헌이 이곳에 온 것은 본래 전원(田園)을 넓게 열고 종족(宗族)을 모두 모아서 같이 살고자 생각했던 것인데, 일은 뜻과 같지 않았고 집 일[家業]이 궁핍[伶仃]하여서 미음죽도 잇지를 못하였으니 참으로 연민(憐憫)할 만하였다. 지금 같은 때에 이러한 사람이 있는데도 그에게 궁벽한 산곡 속에서 먹는 것조차 가난하게 하였으니 세도(世道)는 알 만하였다.

또한 율곡 사후 인조 13년의 기록을 보자.

인조 13년 을해(1635,숭정 8)   5월13일 (임술) 
오윤겸과 조익이, 문묘 종사 건에 관계하여 내린 답을 듣고 글을 올리다 
 집이 가난하여 형제가 모두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였는데, 그의 처가는 재산이 조금 있어서 장인 노경린(盧景麟)이 서울에 집을 사 주어 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형제들의 가난함을 차마 못 보아서 곧바로 그 집을 팔아 무명을 사다 나누어 주어 끝내 한 고랑의 터전도 없게 되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나갈 수 없는 자는 모두 불러다 같이 살며 죽을 쑤어서 함께 먹었습니다
(*주* 노경린은 율곡의 장인)

위의 기록말고도 율곡은 가난하고 청렴했다는 기록은 많다. 특별히 율곡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기록은 없으니 청렴했다고 할수 있다 . 그런데  율곡은 과연 가난했을까?

기록에 나온 시기를 다른 문헌과 율곡의 유산분배 기록시기를 파악해보면 저 시절 율곡의 집안은 큰 부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은 율곡집안에서 나눈 유산 분배 기록인 율곡선생남매분재기[栗谷先生男妹分財記]이다. 명종 21년인 1566년, 율곡의 31세때 율곡의 4형제와 집안의 재산을 분배한 기록이다.

율곡집안의 분배재산은 상당하다.아버지 이원수가 죽은후 5년후에 형제들이 모여 재산을 분해했는데 이를 화회(和會)라고 하며 이 기록은 여러 가문의 것이 전해지고 있다. 율곡집안의 유산분재기록은  조선 전기의 기록이라 상당히 중요한 가치가 있어 보물 4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첫째 아들 선(璿)에게 논 15마지기와 텃밭 1일경(日耕), 노비 16명을, 첫째 딸에게 논 32복(卜) 10마지기와 밭 29복, 노비 16명을, 둘째 아들 번(璠)에게 논 14복 8마지기와 밭 11복 반일경, 노비 16명을, 둘째 딸에게 논 14복 8마지기와 밭 14복, 노비 15명을 상속했다.  (참고자료  : 중원대 이상주교수의 율곡남매분재기 번역)

율곡이 논 14복과 밭 19복을 물려받았으며 노비만 자그마치 15명이나 유산으로 상속받았다. 이 물려받은 노비또한 10세부터 40세까지의 생산력이 높은 노비가 15명중 10명이나 되었다.
**************************************************************************
참고: 노비 15명을 집안에 두었다면  다른 모든 요소 배제하고 쌀소비량이 얼마인지 살펴보면 율곡선생이 사망한후  비슷한 시기인  1591년 오희문(吳希文)이 기록한 쇄미록 [瑣尾錄] 에 쌀 소비량이 나와 있는데  당시 성인남자 한 사람이 한끼에 쌀 7홉을 먹었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좀더 자세하게 기록한 문헌으로는 조선후기의 학자 이규경(李圭景 : 1788∼1863)이 쓴 백과사전류의 책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에 보면  성인남자는 쌀 7홉, 여자는 5홉, 아이는 2홉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당시 율곡의 노비들이 먹는 쌀을 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양이 필요했으며 그 시대에는 지금보다 한끼에 쌀을 약 3배먹었고 하루 두끼를 먹었다. 이는 대략 계산하여도 1년에 쌀 100가마가 필요하였다.

 율곡남재분재기에 상속받은 노비들은 집에서 함께사는 솔거노비인지 외거노비인지 나와 있지 않으나  만일 주인의 관직을 따라 가서 수발을 들 경우에는 월 쌀 5말, 베 반필을 받았다.
******************************************************************************************

그럼 율곡의 사후 얼마나 과장되고 미화되었는지 살펴보자.
인조 13년의 오윤겸과 조익의 상소문에 올린 율곡에 대한 내용에는 “형제들의  가난함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라며 장인에게 물려받은  집을 팔아 형제들과 나누어 가졌다” 라고 하였다.그러나 율곡의 형제들은 거의 똑같이 유산을 상속했으며  심지어 시집간 딸도 공평하게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다.

( 자료출처 : 박도식 관동대교수 논문 : 율곡남매 분재기 연구)

또한 허봉의 기록에는 집안이 궁핍하여 미음죽도 먹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또한 율곡의 청렴함을 강조하거나 당시 허봉을 만났을때 율곡이 몸이 약해 앓고 있던 상황에서의 오해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당시 율곡이 만났을때는  36세때인데 율곡이 땅과 논을 합쳐서  33복을 물려받은 시기는 31세때로 겨우 5년밖에 지나지 않았을때이다. 

혹시 율곡은 5년만에 집안에 우환이 있어서 다 날렸던 것일까?
그렇지도 않다. 율곡은 형제들과 유산을 분배하던 해에 사간원 정원과 이조좌랑을 지냈다.이조좌랑은 정5품인데 당시 정5품의 녹봉은 쌀 28석 (1석은 144kg) 보리 5석, 콩 10석, 면포 11필을 녹봉으로 받았다. 이 시기에 녹을 받지 않고 거부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율곡은 형제들을 함께 부양하기 위해 늘 가난했다는 말은 맞을까?
당시에는  벼슬을 하는 자식이 형제를 다 보살피는 관습이 있었다.그러나 7명의 형제간은 율곡과 비슷하거나 더 많이 물려받았으며 서모 또한 15복의 논과 밭을 물려받았다. 노비만 합쳐서 모두 119명을 형제들이 물려받은 집안이  모두 죽도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왜 율곡은 가난하고 청렴한 학자와 정치가의 이미지만으로  남게 되었을까.
이것은 당대의 동인,서인,남인, 노론 소론등 파벌과 당파싸움의 영향에 밀리지 않으려 제자들이나 후대에 의한 과장과 미화가 덧붙여진 결과이다. 또한 선비의 명예에 많은 재산은 어울리지 않기에 청렴함을 강조하고자 실제보다 크게 과장하였다.    (그런 이유로 임진강 적벽에서 뱃놀이를 하며 평생을 막역지우로 지냈던 우계와 율곡의 친분이  제자들에 이르러서는 멱살잡이를 할 만큼 서로를 견제했던 기록들이 문헌에  나온다)

율곡을 억지 미화하고 신격화하는 것은 오히려 선생의 업적을 해치는 일이다.  율곡은 있는 그대로를 보아도 한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다. 글쓴이는  문헌연구를 통해서 율곡에 대한 일화들이나 기록들이 실제보다 미화되다 못해 신격화를 시키는 사례들을 보았고 바로잡기를 하여왔는데   기록에 의하면 율곡은 가난한게 아니라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었으며   화석정 정자를 보수하고 새로 지을 수 있는 부자였다.

율곡이 미음죽도 못먹는다는 기록만으로 율곡의 가난함을 칭송하는 문헌을 쓰던 그 즈음에  율곡과 형제들은 7남매의  재산분배가  노비만 119명이며 논밭이 수만평임을 기록으로 남겼다.또한 황해도 석담에도 학교인 은병정사를 지을 만큼  재산이 있었다.

이런 기록들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오로지 율곡은 가난했다고만 하며 선비사상과 가난을 연결시키는 것은 후세의 연구자들이 사실을 왜곡하며 위인을 욕보이는 것이다.  이미 충분하게 알려진 자료들만 검토해도 확인되는 내용들을 연구하지도, 검증하지도 않고  율곡과 가난을 연결시켜 청렴함을 부각시키려는 사학자들과 연구자들은  큰 실망을 금할 수 없다.

본 연구는  율곡의 화석정 정자 바로 아래에 있는 집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위인의 일화와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던 평범한 촌사람의 연구이며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파주를 사랑하고 율곡을 사랑하는 이들이 본 연구에 오류가 있음을 밝혀준다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것이다.

–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화석정 사람 김현국 –

  • 인공지능과 비트코인이 현대인의 생활을 사로 잡고 있는 지금 시기에 율곡 선생의 청렴 이야기는 관심 받기가 쉽지 않다. 다만 어느 시대라도 암묵적이거나 일부의 특별한 목적으로 사회적 오류를 정당화 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정당해진 오류는 사실처럼 변질되면서 편견과 불신이 만들어 진다.
    율곡선생의 청렴에 대한 이 글이 우리가 익숙해진 것들에 대하여 다시 되돌아 보고 분석하면서 객관적 사실에 대한 중요성을 느끼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