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운명 – 소설

문보라 (파주 적성출신)

고등학교 마지막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7월에 접어들면서 실업반 아이들 대부분은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학창시절 마지막 방학이라고 생각하니 애착이 갔다. 훌쩍 여행이라도 다녀오고 싶었지만 엄마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구멍가게를 하시는 엄마는 가게를 찾는 손님들에게 한없이 친절했다. 엄마가 외출할 때면 가끔 가게에 나가 물건을 팔았다. 싹싹한 주인장 어디 가셨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엄마를 1%만 닮았어도 싹싹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엄마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식들 중 유독 미숙이만 아버지를 쏙 빼닮았어. 어쩜 생김새며 착해빠진 성격이며 걸음걸이까지 똑같을까?!” 아버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속내가 말투에서 느껴졌다.

자주 엄마의 눈치가 보였다. 엄마라는 존재가 포근함보다는 두려움으로 느껴진 지 오래다. 엄격하게 훈육하던 외할머니의 영향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늘 한결 같은 말을 내뱉었다.

“너희 외할머니가 너무 엄격해서 엄마는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고 학창시절을 보냈다. 외할머니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단다. 자식을 낳으면 너희 할머니처럼 훈육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단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정작 당신도 외할머니랑 똑같이 자식들을 대하면서도 당신은 아니라고 우기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엄마도 외할머니랑 똑같아요. 제발 저에게 자유를 주세요.”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런 말은 절대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엄마에게 순종하며 조용히 살고 싶었다.

8월 초 정오의 태양은 강렬했다. 뜨겁다 못해 아스팔트를 녹여버릴 것만 같았다. 안방에 켜놓은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40년 만에 찾아온 폭염이라는 앵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후에 엄마가  “여보” “여보”  아버지를 불렀다.

“여보, 택시 좀 불러요.”

“어딜 가게”

“지금 바로 울산에 내려가야 해요.”

“울산엔 왜?”

“우리 정태가..우리 정태가 의식이 없대요.”

“정태가 의식이 없다고?”

“지금 정태 친구 광수한테 전화 온 거예요.”

광수오빠는 같은 동네 사는 친구였다. 오빠와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다. 삐쩍 마른 왜소한 모습은 병자 같은 느낌을 주었다. 너무 말라서 군대도 면제받고 면사무소에서 방위병으로 생활하다가 제대를 했다. 제대 후 서울로 가서 오빠와 함께 자취를 했다.

엄마는 타향살이 하는 오빠에게 의지할 수 있는 고향친구 광수오빠가 곁에 있어서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가끔씩 오빠 소식이 궁금하면 광수오빠에게 안부 전화를 걸기도 했었다. 엄마는 옷장에 있던 손가방을 꺼내 들으며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우리 정태 죽으면 어떻게요. 정태 죽으면 나 못살아 여보”

“당신 진정해요. 깨어날 테니 걱정 말고 어서 내려갑시다.”

콜택시는 부르자마자 단숨에 달려왔다. 흐느끼는 엄마와 엄숙해 보이기까지 하는 아버지를 태우고 택시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집안은 고요했다. 낮인데도 혼자 있으려니 공포감이 들었다. 오빠의 소식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전화기 앞에서 마치 조각상이라도 된 것처럼 몇 시간 동안 꼼짝하지 하고 앉아 있었다. 전화기 벨이 울려온 것은 밤 10시였다. 담담한 목소리는 아버지였다.

“미숙아, 집은 별일 없지?”

“네, 아버지..근데 오빠는 어찌 됐어요? 깨어났어요?”

“아니 니 오빠 죽은 것 같다.”

“네?!! 오빠가 죽었다고요?.. 결국 깨어나지 못한 거예요?

“아니, 아까 광수가 우리가 충격 받을까봐 거짓말을 한 거란다.”

“아..네???…

“아직 오빠 시신을 찾지 못했단다. 일단 오늘은 자구, 내일 날 밝아오는 대로 오빠를 찾기로 했다.”

“지금 오빠 어디 있는데요?”

“아마도 계곡 물 속에 있겠지”

“아버지, 어쩌다가..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정태가 튜브를 놓친 연희 구해주고 본인은 다리에 쥐가 나서 못나왔다고 하더구나.”

“연희라면…그 언니?”

“미숙아, 긴 이야기는 집에 가서 하구 이만 끊으마”

“아버지, 엄마는 어때요?”

“엄마는 정신 못 차리고 있지 뭐, 문 꼭 잠그고 자거라”

뚜뚜뚜…

우리 집은 5남매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나와 작은언니 사이에 여자 아이 한 명이 더 있었는데, 태어난 지 백일도 채 되지 않아 열병으로 죽었다고 했다. 나와 작은언니는 8살 차이가 났다. 오빠와 큰언니, 작은언니는 모두 두 살 터울이라 셋은 사이좋게 잘 지내는 편이였다. 언니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갓 스물이 넘자마자 시집을 갔다.

엄마는 형부들이 죄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사고를 쳤으니 식이라도 올려줘야 할 것 아니냐며 외양간에 있던 소를 두 마리씩 팔아 결혼식을 치렀다. 언니 둘을 지켜보며 나는 커서 저러지 말아야지 마음을 굳게 먹었었다.

엄마의 깊은 한숨소리를 옆에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딸 셋 모두 사고 쳐서 시집갔다는 불명예를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았다. 언니들이 일찍 시집을 간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엄격한 엄마로부터의 해방을 꿈꾸었을 것이다.

엄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혼이라고 늘 생각해 오던 나였다. 언니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 뻔하다. 그러니 언니들만 흉볼 것도 아닐 일이었다. 엄마에게도 분명 약간의 책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반면 서른 살이 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아 엄마의 속을 썩이는 우리 집 맏아들 오빠가 있다. 나랑은 띠동갑이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 그런지 살가운 정은 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살을 맞대고 살아야 가족끼리 정이 더 드는 것인데, 오빠는 고2 때 집을 나갔다. 아버지와의 갈등이 깊어졌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겐 한없이 자상한 아버지였지만 오직 오빠에게만 엄하셨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어린 마음에도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의 관계는 미묘했다.

아버지는 오빠의 일거수일투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는 것부터, 늦잠을 자는 것까지 잔소리를 해대시고 인상을 찌푸리곤 했다.

특히, 공부에 관심이 없는 것을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고2 여름방학 때 오빠는 소리 소문 없이 집을 나갔다. 아버지에게 물세례를 받은 날이었다. 오빠가 가출한 날 아침에 아버지는 코를 풀며 세수한 물을 오빠가 자던 방문을 열어 뿌렸다. 그 광경을 있던 식구들은 놀라서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악연으로 인해 가장 속이 상한 것은 엄마였다. 오랜 시간 엄마의 속은 시커멓게 타서 가루가 되어버릴 지경이었다. 오빠가 가출 하고 며칠 동안 연락이 되지 않자 엄마는 속이상해 밥을 하다가도 훌쩍거리셨다.

나중엔 연락이 되고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차라리 집을 나간 것이 잘한 짓이라고 하시면서 애써 초연한 얼굴빛을 하셨다.

나도 오빠가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확신했다. 적어도 그 둘은 같이 살면 안 될 운명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 사실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을 터였다. 집안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그렇게 오빠가 집을 나간 후 간간히 명절 때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엄마는 오빠만 보면 눈을 붉히셨다. 함께 살고 싶은 사랑스러운 아들이지만,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지 못하는 애꿎은 팔자를 탓했다.

가끔 찾는 큰아들을 탓할 생각은 없는지 아버지도 그저 말없이 고요하게 명절을 보냈다.

작은언니가 오빠가 일하는 레스토랑에 가서 스테이크를 먹었다고 자랑을 했다. 고기가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도 오빠가 일하는 레스토랑에 가보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오빠가 다시 가족들과 함께 살게 된 것은 서른이 막 넘을 무렵이었다. 동네 이장의 소개로 아버지가 공장 경비로 일을 하게 된 지 3년쯤 되었을 때 공장에서 운전할 사람을 뽑는다는 소리에 아버지가 오빠에게 연락을 했다.

가족들은 서로의 귀를 의심했다. 여기에서 애비와 같이 일 할 생각이 없느냐는 아버지의 말은 식구들을 모두 놀라게 했다. 망설이던 오빠는 아버지가 직접 전화까지 한 사실에 그저 놀랍고 고마워서 그랬는지 일주일 뒤에 짐을 싸서 집으로 들어왔다. 그때 난 고등학교 3학년 신학기를 맞이한 지 얼마 안 되었고, 오빠나이 서른하고도 하나였다. 이젠 우린 한솥밥을 먹기 시작했다.

둘의 관계는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많은 시간이 흘러서 그랬을까? 둘의 관계는 많이 유연해져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악연이 아니라 평범한 부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엄마는 내심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라도 안고 살아가는 듯 온전히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하신 듯 노심초사했다.

그렇게 함께 살아간 지 5개월이 지났다. 식구들은 무탈하게 보낸 지난 시간들에 감사 했다. 공장에서도 사이가 좋은 부자사이로 소문이 났다고 했다. 아버지는 오빠를 챙기고, 오빠는 아버지를 챙겼다. 그 모습이 보기 좋다며 공장사람들이 한소리씩 했다고 동네 이장님이 집에 들러 평소 듣지 못했던 공장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장님은 공장사장과 친한 친구사이였다. 평소 아버지의 성실함을 알고 있던 이장님의 소개로 경비를 시작한 터라 엄마는 이장님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장님이라 그런지 입담이 좋으셨다. 같은 이야기를 해도 재밌게 하는 재주가 있는 듯 대화하는 내내 엄마는 싱글벙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엄마랑 궁합이 맞으셨는지 한 시간 동안 냉커피 한 잔을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이장님께서 넌지시 말을 이어가셨다.

“근데, 아주머니 정태 나이가 몇 살 이유?”

“정태가 올해 서른하나지, 그건 왜?”

“아, 글쎄 그 공장 경리로 일하는 연희라고 내 친구 딸이지 뭐유, 그 연희가 정태를 많이 좋아하나보더라구”

“그 색시 나이가 몇인데?”

“올해 스물둘 됐나?”

“아이고, 너무 어리네..정태가 맘에 들어하면야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무 어리네.”

“정태도 서른 살 넘었으니 이제 장가보내야지, 아줌니 안 그래?”

“그래야 되는데..색시가 서울에 있다고는 하는데, 도통 자세히 말은 안하니깐 잘 모르겠네”

“아줌니가 정태한테 살짝 물어봐, 그 경리직원 연희 어떠냐고?”

“알겠네, 내 한 번 물어나 보깨”

“그럼 아줌니 부탁혀요.”

엄마를 향해 앞니가 드러나게 활짝 웃으며 돌아섰다. 여름태양에 시꺼멓게 그을린 얼굴이라서 그런지 유난히 치아가 하얗게 빛났다. 내색은 안했지만, 엄만 오빠가 퇴근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가 서른을 넘었으니 엄마로서도 큰아들 장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을 것이다.

바싹 구운 자반은 적당히 짭짤한 것이 고소한 맛까지 더해졌다. 감사한 마음으로 맛나게 저녁을 먹었다. 아버지는 24시간 교대근무라서 오늘저녁은 집에 오시지 않고 내일 아침 일찍 퇴근을 하시는 시스템으로 근무를 하셔서 매일 피곤한 얼굴빛을 하고 계셨다.

상을 치우자마자 엄마는 오빠에게 이야기 좀 하자고 했다. 아마도 아까 이장님이 오셔서 하신 말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정태야, 너 진짜 서울에 색시 있는 거 맞아?”

“응, 엄마 있어요. 왜 제 말을 못 믿어요?

“니가 얼굴을 보여줘야 믿지”

“그렇게 궁금하면 이번 달에 인사시킬게요.”

“진짜여? 그래 얼굴이나 보자, 근데, 그 공장 경리 중에 ‘연희’라고 너 좋아한다며?”

“누가 그래요? 엄마, 난 관심 없어요. 너무 어려서 그냥 막냇동생 같은 아이야”

“그래? 진짜로 넌 싫은겨?”

“싫다기보다는 미숙이랑 나이도 몇 살 차이 안 나고, 나이가 어려서 싫어요.”

“그런 거구나, 그래 서울색시 꼭 보여주기다.”

“그래요.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내 맘이 급해서 그러지, 너 장가 언능 가야하는데, 나이가 서른이 넘었잖니”

“요즘은 장가 늦게 가는 추세잖아요.”

“그래, 엄만 우리 큰아들만 믿는다.”

그로부터 2주 후 소개시켜주겠다고 약속했던 서울색시가 오빠와 함께 집을 찾았다.

고향이 서울인 색시는 나이가 서른이었다. 오빠랑 1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고, 얼굴은 하 얗고 곱상하게 생겼다. 누가 봐도 서울사람 티가 났다. 시골에서 자란 나로서는 놀라울 만큼 예쁘고 고운 그 언니가 좋았다.

몸에 좋다는 가지튀김도 하고, 엄마랑 아침부터 분주하게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엄마는 매우 들떠 있었다. 음식을 만들면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셨다. 엄마가 기분이 좋을 땐 언제나 콧노래를 부르셨다. 하긴, 저렇게 고운 언니가 오빠와 결혼할 상대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평생 밥 한 번 해보지 않았을 것 같았다. 말소리도 저음에 부드러웠다. 우리 식구는 반가운 손님 서울색시에게 홀린 듯 하루를 보냈다.

예의도 바르게 보였고, 머리스타일이나 옷매무새가 정갈하고 단아했다. 혹시 텔레비전에 나오는 탤런트가 아닌가? 할 정도로 얼굴에서 광채나 났다.

서울색시는 우리 집서 하룻밤을 잤다. 세수도 시뻘건 고무대야에 물을 담아 허리 굽혀 해야만 했고 재래식 화장실도 적응할 수 없는 사건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고 간다고 말했을 때부터 난 안절부절못했지만 서울색시는 환한 미소를 끝까지 잃지 않고 갔다.

떠나면서 내 손에 시퍼런 종이돈 몇 장을 집어 주었다. 착하게 생겼다는 말과 함께..

엄마, 아버지는 내년 봄이라도 식을 올렸으면 했고, 서울색시도 다음 달쯤 상견례를 했으면 한다고 했다. 계획에 차질이 없는 한 내년 봄에 그 어여쁜 서울색시에게 오빠가 장가를 갈 것 같았다. 서울색시가 다녀가고 오빠의 결혼설이 나돌 때쯤 공장경리로 일하던 ‘연희’의 막판 애정 공략이 시작되었다.

매일 매일 오빠에게 손 편지를 전해 주었다. 공장에서 매일 얼굴을 보기 때문에 피하지도 못하겠다고 오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엄마에게 말했다. 일주일이 자나서 오빠는 나에게 5통의 편지를 건네주면서 함께 답장을 쓰자고 했다.

편지라면 자신 있었다. 친구들의 연애편지 대필도 수십 번 썼던 경험이 있었다. 오빠의 주문사항은 매우 어려웠다. 연희언니가 상처 안 받고 오빠를 떠나가게 만들 수 있도록 편지를 쓰라고 했다. 오빠의 주문에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이건 바로 피를 흘리지 말고 살을 도려내라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아무리 글을 잘 쓴다고 해도 내 능력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편지였다.

건넛방에 있던 타자기를 가져와서 어려운 편지 작업을 시작했다.

“오빠, 상처를 안주는 건 불가능해”

“그런가?”

“그럼 당연하지, 그리고 아예 큰 상처를 줘서 마음을 돌려야 해”

“어떻게 그렇게 해”

“그렇게 해야 연희언니가 다시는 오빠에게 미련을 두지 않을 거 아냐”

“미숙아, 연희가 날 너무 좋아해..내가 이 편지 주면 자살이라도 할까 봐 걱정이다.”

“연희 언니가 자살할까봐 상처를 못줄 거라면 오빤 서울색시 버리고 연희언니랑 살아야해..

그럴 거야?”

“아니, 그럴 순 없지”

“그럼 마음 단단히 먹고 독하게 써 내려 가야해, 알았지?”

“그래”

마음이 워낙 약한 오빠는 독하게 써내려간다고 다짐을 몇 번이고 했으면서도 완성된 편지는 젤리처럼 흐물흐물했다. 오빠에게 보낸 연희언니의 5통의 편지는 폭풍 같은 감성과 사랑이라는 감정이 보태져서 누구라도 읽으면 마음이 동할 문장들이었다.

마음이 약한 오빠가 그 편지를 읽고 독한 문장을 쓸 수 없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함께 작업한 결과물은 무려 3시간이 지나서야 나왔다. 본인의 글로 도저히 편지를 쓰지 못할 것 같아 나에게 타자를 쳐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이정도의 편지라면 연희언니가 자살은 하지 않을 것 같았고, 생각이 있는 여자라면 그쯤에서 마음을 정리하고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편지를 받은 연희언니는 여전히 오빠를 포기 못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편지를 받고도 포기를 못하겠다고 하는 연희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오빠의 친구들을 꼬여 이번 여름휴가를 울산으로 함께 떠난 것이 분명했다. 집에서는 친한 친구 셋이서만 여행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 아버지의 전화 마지막에 ‘연희’라는 이름이 튀어나왔을 때 등골이 오싹했다.

연희언니를 구해주고 오빠가 죽었다는 말이 아닌가? 어쩜 그 둘의 인연은 그렇게 꼬였을까?

서울색시가 다녀간 후에 엄마는 용하다는 점집을 다녀왔다. 궁합을 보기 위해서였다. 서울색시와는 궁합은 좋게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연희언니와의 궁합은 매우 좋지 않았다.

연희언니의 성화에 이장님은 생년월일이 적힌 메모지를 엄마에게 전하고는 사라졌었다. 그것이 연희언니의 출생 연월일과 시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예감은 적중했다. 엄마는 혹시나 해서 서울색시 궁합을 보러 간 점집에서 2개의 생년월일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던 것이다.

점쟁이는 연희언니랑 결혼하면 오빠는 1년 안에 죽을 궁합이라는 끔찍한 이야기를 했다고..엄마는 출근하는 오빠를 불러 세워 신신당부를 했다. 절대 연희랑은 말도 섞지 말라고..

이런 저런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혼자 큰방에 덩그러니 누워 오빠 생각만 했다. 보는 사람마다 오빠가 잘생겼다고 했다. 사실이 그랬다. 미남이었다. 큰 키는 아니었지만, 서글서글한 눈매에 성격도 좋았다. 기타도 잘치고 노래도 잘 불렀다. 중학교 때부터 독학으로 배운 기타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언젠가 식구들 앞에서 귀에 익은 팝송을 기타를 치면서 들려주는 모습을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본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오빠가 이 세상을 벌써 떠났을 리가 없었다. 아직 아물지도 않았을 아버지에게 받았던 상처들과 가출 후 냉혹한 사회에서 홀로서기를 했던 10년 동안 토해내지 못한 애환들도 많았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오빠의 미소는 그 모든 것을 삼켜버릴만큼 아름답기만 했다.

불의를 보지 못하는 성격이라 엄마 속을 많이 섞였다. 길거리 패싸움에 휘말려 큰일을 치른 적이 있다. 두 조직간에 싸움이었는데, 길거리에서 싸움을 말리다가 같은 조직원인줄 알고 경찰에 잡혀갔다. 급기야는 없는 살림에 많은 돈을 들여 변호사를 사야만 했다.

결국 재판을 통해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우리 집에서 가장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그 후로도 몇 번인가 남의 일을 지나치지 못해 속을 태워야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법원으로 쫓아다니면서 오빠의 일을 돌봐주고 항상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그런 엄마가 대단했다. 내가 엄마가 된다면 저렇게는 못할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는 오빠가 엄마로서는 더 애착이 갔기 때문이었을까? 오빠와 관련된 일에는 맨발로 나섰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오빠를 믿고 응원해주었다. 내 마음도 이렇게나 아픈데, 엄마의 마음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밤새 뒤척이며 새벽을 맞았고, 아침결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배고파서 아침을 한 술 뜨고 다시 전화기 앞에 앉았다. 언제나 또 다시 전화가 올까? 끝없는 기다림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정적을 깨고 전화기가 울린 건 이글거리던 8월의 태양이 머리위로 올라온 정오였다.

“여보세요?”

“애비다.”

“아버지, 오빠는요?”

“오빠 시신을 찾아서 병원에 안치했다. 잠수부 사서 시신을 겨우 찾았단다.”

그렇게 침착하게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강한 척 하시던

아버지라해도 아들의 죽음 앞에서 어찌 초연해질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결국 말을 흐리시고는 다시 연락하겠다고만 하시고 전화를 끊으셨다. 한동안 멍하니 아무생각 없이 앉아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빠가 좋은 세상으로 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일밖에는 없었다. 설사 기도하지 않아도 착하게 산 오빠는 좋은 곳에 갔을 것이다. 소중한 한 생명을 구하고 자기 목숨을 버렸기에 더더욱 확신이 생겼다.

오빠를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던 연희언니의 심정은 지금 어떨까? 그런 사람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연희언니 때문에 오빠가 죽었다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 마음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제일 걱정이 되는 사람은 엄마였다. 그렇게 믿고 사랑하던 큰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나 있을까?

아마 그 사실을 인정하지도 못할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오빠가 보고 싶어서 오빠 방에 들어갔다. 앨범을 뒤적였다. 가족끼리 함께 찍은 사진과 서울에서 지낼 때 동료들과 찍은 사진들, 실제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서울의 야경을 멋지게 찍은 사진들까지 오빠의 사진첩은 꽂을 공간 없이 사진들로 꽉 차 있었다.

오빠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언젠가 백만 원이 넘는다는 좋은 카메라를 메고 집에 왔었다. 식구들 모두 신기한 마음에 한 번씩 셔터를 눌러보았다. 나도 열 장이 넘는 사진을 찍었지만, 초점이 맞지 않은 탓에 사진이 흐리하게 나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다.

오빠가 찍은 사진은 선명하게 잘 나왔다. 그 후로도 오빠는 집에 올 때마다 잊지 않고 카메라를 가지고 왔고 오빠가 찍은 사진은 가족 앨범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옛 생각에 빠져들고 있을 때..

누군가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학교에서 여름캠프를 떠났던 동생이 집으로 돌아왔다.

“누나, 집이 왜 이렇게 조용해?, 엄마랑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

“사진을 보다가 말문이 막혀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뭐야, 누나 울었어? 왜 그래?”

“수태야, 오빠가..오빠가 죽었대”

“응??..그게 무슨 소리야 형이 왜 죽어?”

“진짜야..연희언니 구해주고 오빠는 다리에 쥐나서 나오지 못하고 죽었대..

“형이 계곡으로 친구들이랑 물놀이 간다고 나한테 그랬는데..그러면서 나보고 물 조심하라고 그랬는데..“

“수태야, 우리엄마 불쌍해서 어쩌냐, 오빠만 보구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누나, 진정해, 산 사람은 다 살아가게 되어있다자나”

동생의 한마디에 훌쩍이던 울음을 멈추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보다 세 살이나 적은 동생이 의젓해 보였다. 동생은 오빠랑 외모적으로는 닮았지만 속은 많이 달랐다. 오빠처럼 감성적이지 않은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였다. 그게 제일 부러웠다. 이성보다 감성이 먼저 나가 곤란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동생은 그걸 차단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오빠와 언니 둘은 나이 차이가 많아서 살갑게 지내지 못했는데, 남동생하고는 어릴 적부터 친했다. 남동생과 밥 먹듯이 싸운다는 친구와는 달리 가족들도 인정하는 우애 깊은 오누이로 지냈다. 동생은 내 말을 잘 들었고, 나도 동생의 부탁이라면 언제든지 들어주었다. 동생이 옆에 있으니 마음이 한결 든든했다. 더 이상 집에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두려움도 사라지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오래도록 동생과 오빠와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집을 떠나 생활한 오빠라서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빠를 화장하고 집으로 돌아온 엄마와 아버지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빛에 어디론가 영혼을 빼앗겨버린 사람처럼 멍한 상태로 지냈다.

엄마는 주기적으로 오열을 토했다. 밥상을 차러 가져다 드려도 먹질 못하셨다. 밥이 모래알처럼 입안에서 굴리기만 해지고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쌀죽을 쑤어 가져다 드려도 몇 목음 넘기지도 못하고 죽 그릇에 눈물만 뚝뚝 흘리고만 계셨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엄마의 행동이 이상하기도 했다. 문득문득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대문이 열릴 때마다 엄마는 말했다.

“미숙아, 오빠니? 오빠 왔나보다.”

“엄마, 오빠 아니에요.”

“아냐, 나가봐봐 오빠 맞을 거야, 오빠가 온다고 했어”

“엄마, 정신 차리세요. 오빠는 하늘나라로 갔어요.”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니 오빠 곧 올 거야, 그러니깐 문 잠그지 마..”

그렇게 한 달을 엄마 곁에서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힘들었던 여름방학이 끝나고 난 다시 학교를 다녔다. 겨우 5명의 아이들과 교실에서 취업공부를 했다.

책의 내용이 머리에 들어가지 않았다. 엄마가 끼니를 잘 챙겨 드시고 계실지 그게 걱정되었다. 집에 가보니 엄마가 오빠 방에서 울고 계셨다. 사진이며 옷가지며 이제 태울 때가 되었다면서 그동안 오빠가 돌아올지 몰라 망설이고 있던 짐들을 정리했다. 이제야 엄마가 오빠를 보낼 마음이 생긴 것 같았다. 어제 동생이 엄마의 마음을 바꿔먹게 한 것일까? 어린 게 속도 깊어서 엄마의 마음을 돌리다니 기특했다.

마당 한구석에 소여물 쑤는 솥단지에 물을 한가득 넣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오빠의 사진들과 평소에 입었던 옷가지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엄마는 사라져가는 오빠의 물건들을 바라보며 주저앉아 한참동안 한스러웠던 가슴을 쥐어짜는 듯 고통스러워했다.

“정태야..우리 집 맏아들 정태야..그렇게 빨리 갈 거였으면 왜 왔었니? 유독 엄마 속을 썩였던 너라서..내가 더 못 보낼 것 같구나“

동생이 엄마를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어미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가는 아들이 야속한 듯 오랫동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평소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아들이었기에 더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셨다. 태어나서부터 아버지는 오빠를 미워만 했다고 한다. 오빠가 5살 때부터 아버지는 매를 들었다고 했다.

한창 어리광 부리며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아야 할 어린나이에 매를 맞아야만 했을까? 가슴이 아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언니들과 동생과 나에게 매라곤 한 번도 든 적이 없는 아버지였다. 말로 표현은 안하셨지만 속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고 걱정해주셨다. 우린 그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버지..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버지 고향은 황해도 평산 이다. 고2때 6.25전쟁이 터졌고, 아버지는 던져주는 총 한 자루를 가지고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남으로 내려오셨다. 그러다가 UN군 포로가 되어 거제도 수용소에서 지옥 같은 시간들을 보내셨다.

그곳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기적이라고 느낄 만큼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들이 죽어나갔다고 했다. 수용소에서 좌·우파 간에 갈등으로 인해 많은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승만대통령은 수용소 포로들에게 남쪽과 북쪽으로 갈 선택권을 주었고, 아버지는 가족이 살고 있는 이북이 아닌 남한을 선택하셨다.

남한으로 와서 군인으로 전역해서 생활 하다가 엄마를 만나 결혼을 하셨다.

외롭게 지내던 아버지에겐 소개로 만난 엄마가 너무 좋아서 매일 매일 만났다고 했다. 당직근무인 날에도 엄마를 만났는데, 그 날 하필 부대에 사고가 터진 것이다. 사고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부대에 없었던 것이 알려지게 되었고 결국 아버지는 당직하사관으로서 모든 책임을 지고 옷을 벗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들은 적이 있다.

가진 것 아무것도 없는 아버지가 버티고 살 수 있었던 건 바로 엄마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성실하셨던 아버지는 일을 하고 싶어도 일할 자리가 없어서 돈을 벌지 못하셨다.

그나마 운이 좋아 공사판 일이라도 생기기라도 하면 추위에 꽁꽁 얼어버린 꽁보리밥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며 열심히 일을 하셨던 아버지.. 아버지를 생각하면 언제나 눈물이 난다. 외롭고 힘겨운 인생의 삶과 사투를 벌여 포기하지 않고 삶을 사랑하며 살아오신 것 같아 자랑스럽다.

남들이 아버지가 법 없이도 살 호인이라고 했다. 남들에게도 인정 많은 사람으로 손꼽히면서도 유독 오빠에게만은 냉정했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다. 아버지의 사랑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먼저 하늘나라로 간 오빠라서 더 눈물이 났다. 충분히 사랑받고 행복하게 살다 갔어도 미련이 남을 인생인데, 떠나는 길에 얼마나 많은 미련이 남아 있었을까?

내년 봄이면 서울색시와 결혼해서 알콩달콩 가정도 꾸리고 아기도 낳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시간들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으니 맘 편히 하늘로 갈 수나 있었을까?

엄마는 죽은 오빠를 장가보내야겠다고 새벽에 무당과 함께 산에 갈 것이라고 했다. 죽은 사람을 결혼식 시켜주고 영혼을 달래는 의식을 해야 엄마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고 했다. 살아있을 때도 그랬듯이 자식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미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은 변함없어 보였다.

오빠의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고 돌아온 날 엄마의 얼굴은 한결 밝아 보였다. 장가도 보내지

못하고 떠나보낸 것이 마음이 쓰였는데, 이제 무거운 돌을 마음속에서 꺼내놓은 것 같다며 평온한 얼굴빛을 지어보였다. 살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무수히 많다.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아버지와 오빠의 인연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슴이 아프다. 아버지는 무엇엔가 홀린 것처럼 오빠만 보면 순한 토끼에서 무서운 사자로 변신하며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내셨다. 그렇게 좋아하던 8월의 한여름을 더 이상 사랑할 수가 없다. 겨울보다 더 오싹하게 한기가 느껴지는 것은 고3 여름방학 때 오빠가 하늘나라로 간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의 죽음으로 그 매듭은 풀어졌지만 순한 소의 눈처럼 껌벅껌벅거리는 깊은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눈도 깊어지고 촉촉해 진다. 연희언니는 오빠가 세상을 떠난 후 명절 때마다 우리 집을 찾아왔다.

무릎 굻고 용서를 비는 그녀에게 엄마는 이승에서의 명줄이 거기까지였으니 누굴 탓하겠냐며 하염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셨다. 3년째 되던 추석날 엄마는 이제 그만오라고 부탁했다. 보면 볼수록 마음만 아프다고 했다. 이제 모두 지난일이고 용서를 하였으니..좋은 남자 만나 행복한 가정 꾸미라는 말과 함께..

그로부터 2년 후.. 연희언니의 결혼소식을 이장님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연희언니와 오빠..그들은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이었을까? 어쩌면 그들처럼 우리 인생에 피할 수 없는 비극적인 운명이 존재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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