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 2반 선생님이십니까?

3학년 2반 선생님이십니까?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제69화-

 

때는 바야흐로 1959년, 햇볕이 온화하게 내리쬐던 춘삼월이었다.

과장님께서 뜬금없이 나를 호출하셨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졸병인 나를 왜 찾으시는 걸까? 의아한 마음을 안고 과장실로 들어섰다. 과장님은 나를 보시자 마자, 대뜸 나이부터 물으셨다.

“1934년, 갑술생 27세입니다.”나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장가갈 때가 되었구먼. 내가 중매를 설 테니 결혼하겠나?”

뜻밖이었다. 하지만 사양했다. 경제적인 기반이 없으니 조금 더 있다가 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나 과장님은“결혼해 살면서 세간도 장만하고 경제적인 토대도 마련하면 된다. 처음부터 집을 장만하고 결혼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고 하셨다. 그럼에도 자신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과장실을 빠져나왔다.

신사성 농무과장은 일제 강점기 경성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직에 투신하셨다. 내가 모시던 당시, 그분은 경기도의 농업을 총괄하는 농무과장직을 맡고 계셨다. 몸집은 뚱뚱한 편이었고 걷는 모습은 마치 오리와 같이 뒤뚱뒤뚱 하셨으나 무엇보다 농사업무에 대해서만큼은 소신과 배짱이 있으셨다. 파주군 아동면 금능리가 고향이라 우리 집안과 세교(世交)도 있으셨다.

과장실에서 나와 곰곰 생각해 보니 무조건 거부할 일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소개하겠다는 신붓감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하는 수 없이 몇 시간이 지난 뒤에 과장실에 들어가 중매해 주겠다는 신부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궁금한가? 서울사범을 나와 지금 동대문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아가씨라네. 아버지는 안 계시고 삼촌이 있는데, 그 삼촌이 경기제사 사장이야.”

과장님의 말에 동대문초등학교 몇 학년 몇 반 담임이냐고 재차 물었다. 그랬더니 확인해서 알려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 당시 임시직 촉탁이었기에 결혼생활을 뒷받침할 만한 경제적인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부부가 같이 번다면 경제적인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생겼다.

다음 날, 과장님은 동대문초등학교 3학년 1반이라고 알려 주셨다. 결혼을 하고 안 하고는 둘째 치고, 우선 어떻게 생겼는지, 품위는 있는지, 예쁘게 생겼는지 참으로 궁금했다. 궁리 끝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1968년6월1일 경기도 공무원 임용장
1956년9월15일 서울특별시 교사 임용장

내 자리 바로 옆에 6개월 먼저 들어온 고재명이란 친구가 있었다. 그는 서울농대를 나왔는데, 키는 자그만하고 몸집은 뚱뚱했다. 아버지가 안성군수를 지내신 훌륭한 집안에서 자란 친구인데 말수는 적고 술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나와 같은 촉탁에 한 살 위였고, 벌써 결혼을 한 친구였다. 그 친구에게 요사이 일어난 결혼문제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하고 자문을 받았다.

우선 인상을 보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학교를 찾아가서 학부모인 양 수업하는 것을 복도에서 지켜보기로 하고 그 친구와 같이 갔다.

광화문 경기도청에서 을지로 6가에 있는 동대문초등학교를 가려면 전차를 타고 가야 했다. 그런데 우리가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학교에 도착하니 하교하는 학생들이 몰려나왔다.

여학생을 붙들어 몇 학년이냐고 물었더니 3학년이라고 했다. 이제 복도에서 보기는 글렸다. 그렇다고 그냥 갈 수도 없어서 온 김에 보고 가자 생각했다. 여학생에게 교무실에 가서 3학년 1반 선생님에게 학부모님이 교무실 앞에서 기다린다고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있다가 여선생이 나왔다. 나는 인사를 하고 3학년 2반 담임 선생님이냐고 물었다. 3학년 1반 담임 선생님이라는 답변이었다.

“아, 그러세요. 나는 3학년 2반 담임 선생님을 찾아왔는데, 여학생이 잘못 전달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한 후 돌아섰다. 같이 간 친구가 앞잡이를 서야 하는데 그 친구는 가만히 서 있고 신랑감이 되는 내가 이야기를 했으니 앞뒤가 바뀐 것 같기도 했다.

3학년 1반 담임 선생님이냐고 물어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 다음 이야기가 궁하기 때문에 2반 선생님이냐고 엉뚱하게 물었던 것이다. 3학년 1반 선생님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같이 간 친구에게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만하면 신붓감으로 100% 합격이니 무조건 결혼하라고 권유했다.

다음 날 과장님이 찾으셔서 들어갔더니“자네, 어제 어디 갔다 왔어?”하고 물으셨다. 학교에 갔다 온 것을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다.

“경기제사 사장님이 자네가 왔다 갔는지 확인해 달라는 전화가 왔어. 그래서 묻는 거야.”

이 선생이 집에 가서 삼촌에게 오늘 이상한 남자 두 사람이 다녀갔다고 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키가 작달막하고 뚱뚱하며 말도 없이 서 있었고, 또 한 사람은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시커먼 사람이 말을 건넸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과장님은 신부를 보고 온 감상이 어떠하냐고 물으셨다.

“솔직하게 그쪽에서 좋다 하면 저도 동의하겠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중매쟁이로 중간 역할을 하겠다면서 과장님은“자네는 경기제사 사장님이 여러모로 조사하여 잘 알고 있네”하시면서 그 집안의 내력을 말씀해 주셨다.

경기제사 이용기 사장님은 고향이 경기도 광주군 경안읍에서 자라 제사사업(製絲事業, 누에꼬치로 명주실 뽑는 업)으로 성공하신 분이었고 신부의 아버지는 1.4 후퇴 때 병환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삼촌인 이용기 사장님이 조카 1남 3녀와 자기 자식 2남 3녀, 모두 3남 6녀의 자식을 키우고 계셨다. 큰 조카딸은 서울사범에 보내고 나머지 조카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고 했다. 큰 조카딸은 결혼시기가 되고 자기 밥벌이라도 하니 빨리 결혼시켜 짐을 덜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며칠 후, 과장님은“저쪽에서 가족 상견례를 하자고 하는데 어떠냐?”고 하시어, 부모님과 협의하여 말씀드리기로 하고 상견례 날짜를 잡았다.

1959년 4월초 일요일. 창경원 경양식 식당에서 중매하신 과장님이 참석한 가운데 양가 상견례를 하였고 양가 가족들은 그만하면 만족스러우니 당사자들의 의견에 따르겠다는 분위기였다. 상견례가 끝나고 둘이서 창경원의 동물원을 말없이 걸었다. 그때, 길모퉁이에 경품권을 사서 제비를 뽑아 맞으면 상품으로 교환하는 곳이 있었다. 말도 붙여볼 겸 경품권을 사서 우리도 한번 뽑아보자고 하였다. 이 선생은 그런 것을 무엇하러 하느냐고 했다.

“경품권을 사서 통에 있는 것을 골라 펴보면, 상품에 당첨되거나 아니면 꽝일지 모르지만 재미도 있고 그날의 운수를 볼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하면서“경품권을 사서 뽑아 펴보지 않으면 당첨인지, 꽝인지 모르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인생살이도 결혼해서 살아 보기 전에는 잘 살고 못 사는 것, 성공하느냐 못 하느냐를 모르는 것과 같으니 경품권과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경품권을 사기로 의견을 모았다. 둘이서 신중하게 골라 펴보니 둘 다 꽝이었다. 누구 하나라도 당첨이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의 결혼이 혹시나 꽝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했다.

그늘진 곳에 벤치가 있어 쉬어 가자고 하여 앉았으나, 처음 만난 사람끼리라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서로의 가정환경을 솔직하게 그리고 생활신조를 가식 없이 이야기하기로 했다. 결혼 상대자를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정말로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형제분이신데 쌍둥이였고, 우리 아버지는 동생이었습니다.” 쌍둥이는 유전이 아니니 걱정 말란 말도 덧붙였다. “큰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부지런하여 장사를 하러 팔도강산 안 가신 곳 없이 다니시다가 노년에 금촌에 방앗간을 차렸고 사업을 하시다 돌아가셨는데, 딸만 셋을 두었습니다. 아버지는 좀 게으르신 편이라서 그냥 농사만 지으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같은 동네에서 만나 결혼을 해 10남매를 낳으셨지만 홍역, 마마(천연두)로 6남매를 잃으시고 큰누님과 형님, 그리고 나와 여동생 2남 2녀를 살리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가난했지만 자식만큼은 소중하게 키우셨습니다. 너무 내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이 선생님의 가족 이야기 좀 하시지요?”

이 선생은 차차 알게 될 것이라며 이야기하기를 마다했다. 그래도 궁금하다고 우기니 그제야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니는 18세에 시집오셔서 1.4 후퇴 때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충청도 예산으로 생각되는데, 아버지가 피난 중에 병환이 악화되어 그곳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어머니 나이 32세였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자상하고 다정한 분이었습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많으셔서 시내에 나가셨다가 돌아오실 때에는 그냥 오시는 법 없이 늘 무엇인가 먹을 것을 사가지고 오셨습니다. 피난 갈 때 나의 나이는 14세인데, 아버지 없이 어린 동생들과 피난생활을 하려니 어머니와 함께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피난 가던 중에 힘들고 나이가 많으시니까, 죽어도 집에서 죽는다며 집으로 돌아가시어 피난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32세까지 1남 3녀를 낳으셨는데, 거의 연년생으로 아이만 낳으신 것 같습니다. 또 어머니는 시어머니 없는 성질이 까다로운 홀시아버지 모시느라고 고생을 좀 하셨습니다. 우리 4남매는 아버지 대신 작은아버지가 생활비, 학비 등 살림살이를 다 도와주셨고, 지금도 계속 도와주시고 계십니다. 송 선생님은 가난하다는 것을 강조하셨는데, 어떻게 대학까지 나오셨습니까?”라고 그녀가 물었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는 운동을 좋아해서 축구와 배구선수로 뛰어놀기만 하였습니다. 고3이 되고 보니, 진로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 고민 끝에 부모님과 형님 앞에서 대학진학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형님은 철도국 서울역 전기보안 사무소의 말단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대학진학에 대해 농사짓는 것만으로는 대학 보낼 형편이 못 된다고 하셨으나 형님이 고민 끝에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가면 어떻게든지 도와주겠지만 보결(補缺)이나 다른 방법으로 대학에 가려고 한다면 도와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부모와 형님 앞에서 내 스스로 대학에 합격하지 않으면 안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대학에 진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도와주시면, 부모님의 유산은 받지 않고 나 스스로 생활을 개척해 나가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 후, 나는 일체 운동을 하지 않았고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사랑방 침침한 곳에서 석유등잔불 기름으로 아침이면 코가 새까맣도록 공부를 하였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니 친구들이 모두 공부에 열심이었습니다. 유직형이라는 친구는 파주읍 진골에서 학교까지 약 12㎞를 자전거로 학교를 다녔는데, 시간이 너무 걸려 공부할 시간을 길에서 소비하니 대학에 가기 위해 학교 근처에서 하숙하기를 원했습니다. 또 성상현이란 친구는 교하면 야당리에서 학교까지 10㎞를 걸어서 다니기 때문에 역시 공부할 시간이 없다면서, 그 둘이 내게 하숙집을 구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산 넘어 풀무골, 내가 사는 동네에 정형진이란 후배가 사는데 그의 집 건넛방을 얻어 주었습니다. 우리 집하고는 밭 사이로 아주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둘만의 하숙이 아니라 나까지 합세하여 셋이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수학을 가르치는 서울공대 전기공학과 재학 중에 군속으로 미군부대에 근무하던 김영재 선생님도 총각이라 하숙을 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선생님을 모셔 하숙방에서 같이 밤을 새워 공부를 하였습니다. 김영재 선생님은 수학 선생님이라 수학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는데, 매일 밤을 12쯤 술에 취해 들어오셔서 수학 공부에는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6개월쯤 지나자 유직형이란 친구는 이런 상태에서는 자기가 지망하는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갈 수 없다면서 1학년을 낮춰 용산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했습니다. 유직형은 그 후 고대 법학과에 입학했고, 그 후에는 행정고시에 합격해서 교통부에 근무하면서 기획관리실장, 해난사고 심사위원장까지 지냈습니다.

한편, 성상현이란 친구는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관리와는 상관없는 자유인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지망했으나 낙방을 했습니다. 사실인지는 몰라도 그의 말에 의하면 시험을 잘 보았는데, 떨어질 이유가 없다고 하여 아버지와 같이 대학의 시험지를 확인한 결과, 영어시험지에 이름을 기재하지 않았다는 안타까운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 후, 2차 시험으로 동국대학교 법과대학에 합격하여 졸업까지 했지만 불교에 심취하여 평생을 자신의 소신대로 살면서 사찰을 돌며 불교 신도 교육을 했습니다. ”

나는 농업학교를 나왔으니, 집에서 기차통학이 가능한 동국대학교 농학과에 입학해서 현재 경기도 산업국 농무과(農務課)에 근무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내 얘기만 장황하게 한 것 같아 나는 이 선생님의 학창시절이 어떠했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처음보다는 편안한 얼굴로 말을 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삼촌 밑에서 늘 감사하며 자랐습니다. 어려서부터 선생이 되는 것이 꿈이라 삼촌에게 사범학교를 보내 달라고 하여 사범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광주에서는 다닐 수 없어서, 성동구 신당동인 삼촌 집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삼촌 집이 학교와 거리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졸업하고 동대문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지금 나의 결혼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나 자신은 그리 급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삼촌은 조카와 당신의 자식까지 3남 6녀나 되니, 하나라도 빨리 덜고 싶은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삼촌이 결혼하라고 하면 지상명령이기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결혼 문제는 나의 일생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 선택은 전적으로 나의 의견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마음으로 이 선생을 결혼상대로 결정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나의 설명으로는 선택의 폭이 부족할 것 같아서 이 선생이 마음을 결정하는 데 이해를 돕기 위해 나의 대학시절과 생활신조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나는 대학시절 파주 금촌에서 서울까지 기차로 통학을 하였습니다. 집에서 금촌역까지 30분, 금촌역에서 서울역까지는 1시간이 소요되었고, 서울역에서 을지로4가 학교까지 30분 정도 걸어서 하루에 왕복 4시간이 소요되어 공부할 시간을 길거리에서 소비했습니다. 그래서 친구의 소개로 대학 2학년 때 가정교사를 했습니다. 을지로3가에서 당구장을 운영하는 집인데 형제를 두고 있었습니다. 형은 고2인 준호이고, 작은아들은 중2인 충언이란 학생이었습니다. 작은아들이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성적이 꼴찌라서 유급될 상황이여서 가정교사를 둬 공부를 하도록 할 테니 진학을 시켜 달라고 해서 제가 그 집의 가정교사가 됐습니다. 큰아들 준호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으니 작은 아들을 잘 봐 달라고 했습니다. 그 집에서 자고 먹고 월 3,000환을 받았습니다.

하룻저녁에 1시간 내지 2시간 정도 작은아들의 영어와 수학을 봐줬는데, 고2인 큰아들을 진단해 보니 동생이나 형이나 똑같았습니다. 방에서 잡지책이나 보고 있는 것을, 그 부모는 혼자서도 공부를 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부모에게 이야기하여 큰아들도 같이 공부하기로 하고 3,000환을 더 받아 월 6,000환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공부가 끝나면 당구장에 내려가 당구채 고치는 일을 도와주는 봉사도 했습니다. 그 틈틈이 배운 당구실력으로 150 정도를 칩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가정교사로 들어갈 집에서 이부자리는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이부자리를 꼭 싸서 머리에 이시고 금촌역까지 배웅을 나오셨습니다. 기차가 떠날 때 눈물을 흘리시며 기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고 목이 멥니다. 또, 하복을 갈아입을 돈이 없어 여름 삼복중에 미군이 입던 국방색 겨울바지를 검은색으로 염색하여 입고 다녔습니다. 땀에 칭칭 감겨 걸음을 걷기 힘들었던 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참고 지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잘 살아야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지 모릅니다.

가정교사 생활 1년 6개월을 마치고 나니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집에서 통학을 하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학교농장에서 일일 노동자로 일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학교 학장님의 허락을 받고 농장장과 협의하여 양주군 별내면 묵동리에 학교 배밭 농장과 실습지가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나보다 2년 선배인 황의량 형과 금촌에서 통학을 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농장에 가서 일일 노동자로 일하기로 했습니다.

하루 일당 5,000환을 받고 일하면서 교대로 한 사람은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와서 밤에 노트한 것을 베끼며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농장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청량리 시장에서 판매하고 오면 일당 5,000환을 준다고 하여 새벽 일찍 그 일을 하면 수입도 되고 학교에 갈 수도 있어 청량리 시장에 농산물을 판매하는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수확된 농산물을 저녁에 손수레에 실어 놓고, 새벽 3시경에 묵동리에서 청량리 시장까지 약 10㎞를 끌고 가는데, 중량교를 지나 위생병원의 언덕을 넘으려면 갈지자걸음으로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지 않으면 올라갈 수가 없어 온 힘을 다해 끌었습니다. 참 힘들었습니다. 땀이 흠뻑 젖은 상태에서 청량리 시장에 도착하여 단골 위탁상에게 인계하면 운이 좋은 날은 7시쯤이면 다 팔리고, 운이 좋지 않은 날은 8시나 9시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여 번 돈은 교통비, 식사대, 책 사는 것 이외는 큰 도움이 되질 못했습니다. 그래도 형님한테 용돈을 얻어 쓰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며 4학년 2학기에는 장학금을 탔습니다.”

이 선생은 내가 공무원이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느냐고 물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어렵게 부모와 형님의 덕분으로 졸업을 앞두고 취업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1958년 2월 중순경 김희태 교수님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농림부에서 농촌행정 지도자를 모집한다고 하니 시험을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시험일자와 시험에 필요한 구비서류를 작성하여 제출했는데, 시험일자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었습니다. 원예과목을 선택했지만 많은 학습 분량에 방향도 모르고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지도 몰라 대충 문제가 될 만한 것들만 골라 복습하는 정도로 일주일을 꼬박 사랑방에서 보냈습니다. 시험 당일 문제를 받아 보니 뜻밖에도 평소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노트해 놓았던‘씨 없는 수박의 원리를 논하라’는 것과‘북방의 벼를 남방에 심으면 수학기가 빠른가? 늦은가? 반대로 남방의 벼를 북방에 심었을 때 수확기가 빠른가? 늦은가?’라는 두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참 운이 좋았습니다. 한편으로는 노력하는 자에게는 기회가 온다는 옛말이 생각났습니다. 씨 없는 수박은 우장춘 박사가 육종을 통해서 만든 것이라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동경제국대학의 기하라 시토시 박사와 니시야바 이치로 박사가 1943년에 공동으로 개발한 것입니다. 우장춘 박사는 농업이 과학적으로 이렇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부산 동래 원예시험장에서 시험재배를 한 것 뿐입니다. 씨 없는 수박에 대해 누가 개발했고, 재배방법, 수박의 모양, 수박의 수확기 등을 자신 있게 쓸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구두시험은 영어 농업원서를 놓고 한 구절을 해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정교사 시절에 영어공부를 한 것이 큰 도움이 되어 잘 본 것 같았습니다. 10일 후, 우리학교에서 열여섯 명이 시험을 보았는데, 나만이 합격하고 모두 낙방했습니다. 그리고 1958년 6월 1일자로 경기도 산업국 농무과로 발령이 나서 공무원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입니다.”

나 혼자 열변을 토해 가며 이야기를 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그만하면 어느 정도 나에 대한 소개를 한 것 같기도 했다. 창경원을 나와 집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하니, 극구 반대하여 우리는 거기서 헤어졌다.

며칠 후, 과장님이 부르시더니“저쪽에서 약혼식을 하자고 하는데 어떠냐?”고 물으셨다. 나는 마음으로는 반가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부모님과 상의해 보겠다 하고 과장실을 나왔다.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를 비롯해 상견례에 참여했던 모든 분이 환영했다. 1958년 5월3일 동대문구 신설동에 있는 탑골승방이란 작은 절에서 양가가 모인 가운데 조촐한 약혼식을 올렸다. 서로의 꿈과 각오를 이야기하며 서로의 성격도 파악하는 둘만의 자유로운 시간도 가졌다.

상견례 직후 사진

우리는 매주 토요일 오후2시에 을지로2가에 있는 중앙극장 옆 옥류천 다방에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만나기로 약속했다. 영화 구경도 하고 자장면도 사먹고 앞날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경기도

광주에는 기차가 없어 이제까지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는 기차를 타보고 싶다고 하여 목적도 없이 부산행 열차를 타고 천안까지 갔다 오기도 했다.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처음으로 느꼈고 애틋한 시간을 그녀와 함께 보냈다.

우리의 결혼은 새 생명이 생기를 찾고 꽃들이 만발하는 따뜻한 봄날의 좋은 날을 택하자는 의견도 교환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목표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도 물어보았다. 아직 생각한 바가 없다고 하여 내 의견을 이야기해도 되느냐고 동의를 얻었다.

“어느 철학자는 인생을 우주에 비유해서 말한 바 있는데,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인간은 조물주가 쓴 시나리오에 의해서 자연을 무대로 한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 하더라도 인생의 길은 조물주가 이미 써놓은 시나리오를 벗어나서 행동을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시나리오에서 맡겨진 주연이든 조연이든 자기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얼마만큼 최선을 다하느냐에 따라 관중으로부터 갈채를 받거나 지탄을 받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맡은 일에 대해서는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난한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부모의 책임이고, 죽을 때 가난한 것은 우리의 책임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 최선을 다하자고 약속했다. 잘난 척, 인생 이야기를 주로 하면서 우리의 만남은 한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었다.

어느 날, 과장님이 신부 쪽에서 금년 안에 결혼식을 하자고 요구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내년 봄쯤에 하려고 생각 중이라 했더니 저쪽 삼촌이 금년을 넘기지 말자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면서 중매쟁이 과장님은 그쪽의 의견을 듣는 것이 좋겠다고 권하셨다.

토요일 옥류천 다방에서 만나 결혼 이야기를 하면서 이 선생의 생각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녀 역시 내년 봄에 하는 것이 좋다고 했으나, 삼촌이 금년을 넘기지 않는 것이 좋다고 강력히 말씀하시니 자신으로서는 버틸 수가 없다고 했다. 결혼장소나 주례는 삼촌이 다 준비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고 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녀의 삼촌이 하자는 대로 따랐다.

결혼식

1958년 12월 28일 11시 운현궁 예식장.

드디어 우리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주례는 연세대학교 김윤경 국문학 박사가 맡으셨고 추운 겨울날 난방장치도 없는 데서 신부는 면사포를 쓰고 추위에 떨어야 했다. 주례사가 무려 1시간이나 걸렸다. 김윤경 박사님은 대학 강의처럼 조목조목 써가지고 오셔서 다섯 가지를 강조하셨는데 무슨 말씀인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신부가 옆에서 떨고 있는 것만이 나는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삼촌 집에서 가까운 성동구 행신동에 2만 원짜리 전세방 한 칸을 얻어 험난한 인생길을 내디뎠다.

3학년 2반 담임이냐는 말에 3학년 1반 담임이라 말하던 그녀와의 첫 만남은, 돌이켜보자면 운명이란 생각이 든다. 그녀는 그렇게 내 인생에 깊숙이 들어와 지금은 평생을 함께한 반려자로 남았다. 나는 가끔씩 묻는다. 3학년 2반 담임이냐고. 그럴 때면 그 시절의 풋풋함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마치고 시골집에 어른들께 인사하러 갔다. 아내에게는 처음 가는 시집이다. 시골집은 안채에는 안방, 마루, 건넌방이 있고 바깥채는 사랑방과 소를 기르는 외양간이 같이 붙어 있는 초라한 초가집이었다. 하루를 유숙하고 다음 날 나는 살림살이로 흰 사기 주발대접 두 벌과 밥 지어 먹는 냄비와 쌀 한 말을 갖고 신당동 전셋집으로 왔다. 신혼살림에 필요한 도구는 아내가 모두 준비했다. 우리의 전세방은 2만 원에 단칸방과 부엌이 붙어 있는 집이었다.

아내는 23세의 젊은 나이에 서울사범을 나와 신당동 삼촌집에서 생활하면서 교편을 잡은 지 3년여 밖에 되지 않아 살림을 주도적으로 해본 적이 없었다. 밥을 짓는데 두 식구분의 쌀을 얼마나 해야 하는지, 물은 어느 정도 부어야 하는지 예측이 되지 않아 적당히 자기 소신대로 하니 밥은 3층 밥이 되고 반찬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라 마음속으로 엄청난 고통과 눈물을 흘렸을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3층 밥에 서로 너털웃음으로 다음에 잘하면 되지 하면서 서로 위로해 가며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결혼한 지 1년 6개월 만에 아기를 가졌고 그간 우리는 전셋집을 두 번 옮겨 다녔다. 아내가 배부른 상태에서 학교를 다니는 것을 보는 나는 참으로 미안하고 죄송하고 한편으로는 눈물겹도록 감사했다.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 출산휴가는 1개월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아이를 돌볼 보모나 살림을 맡아서 할 사람을 우리 동네에서 구했다. 모유를 먹일 수 없기 때문에 우유로 키울 수밖에 없었다. 보모에게 우유를 먹이는 방법을 교육하고 낮에는 보모가 담당하고 아내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시달리다 보면 피곤하기 때문에 저녁에는 내가 책임지기로 하였다. 100일 이전까지는 두 시간에 한 번씩 우유를 주어야 한다. 아기가 자다 깨서 울면 연탄불에 물을 끓여서 우유를 타고 뜨거운 우유를 식히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우유가 입에 닿을 때까지 계속 운다. 잠은 토끼잠을 자야했다. 이러한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1남 2녀를 키웠다. 감사하게도 건강하게 무럭무럭 잘 자라 주었다. 나의 월급으로는 우윳값도 댈 수가 없었다. 어느 일요일 처삼촌 댁에 오래간만에 인사 차 갔다. 처삼촌님은 아이도 생기고 했으니 셋방살이는 그만하고 내가 은행에서 대출을 받도록 해줄 테니 20만 원(당시 화폐개혁으로 돈의 가치가 올랐다.) 정도의 범위 내에서 집을 사보라고 했다. 집을 20만 원 정도에서 구입하려 하니 집값이 넘치고 처져서 어려웠지만 금호동 산비탈에 대지 24평, 건평 10평의 작은 집을 샀다. 그리고 그 집을 담보로 융자를 받고 원금과 이자를 매달 조금씩 갚아 가는데 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집이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 소유라는 것에 마음이 흡족했다. 은행에 대출한 융자금을 다 갚는 동안 식구가 늘어 1남 2녀와 보모를 합쳐 여섯 식구가 살기에는 좁았다. 아이들이 사달라고 하는 자장면도 제대로 사주지 못하고 여름휴가도 가지 못하면서 근근이 저축하여 파주군 가까운 은평구 대조동에 대지 43평에 건평 20평으로 집을 늘려서 이사했다. 금호동의 집에 비하면 대궐이었다. 아내는 학교 선생님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교육열이 대단했다. 서울 덕수초등학교(이하 덕수초등학교)를 다녀야 경기중학교 서울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친구네 집으로 아들의 주민등록을 옮기고 덕수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대조동에서 덕수초등학교까지 가려면 버스로 녹번동과 영천 무악재 고개를 넘어 서대문을 거쳐야 한다. 일곱 살짜리 1학년생을 1개월 정도 길을 익히도록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집으로 올 때 버스타고 오라고 버스요금을 주었다. 혼자서 잘 다녔다. 그런데 하루는 저녁이 어둑어둑해지고 아내도 학교에서 돌아왔는데도 오지를 않아 집에서는 사고인 줄 알고 야단이 났다. 학교에 전화를 해보고 담임선생님에게 확인을 해도 학교에서 돌아갔다는 것이다. 파출소에 신고를 해야 하나 조금 더 기다려 보아야 하나 걱정을 하는데 어슬렁어슬렁 여기저기를 보면서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어린 나이에 길을 잃지 않고 돌아오는 것만도 대견했다. 왜 늦었냐고 이유를 물으니 버스요금으로 먹고 싶은 것을 사먹고 돈이 없어 걸어왔다는 것이다. 아이를 보아 주는 사람이 부득이 집에 가고 없을 때는 어디에 맡길 데도 없어 어쩔 수 없이 아이를 학교에 데리고 가서 교실 옆에 놀도록 하고 수업을 마치고 데리고 오는 일도 자주 있었다. 참으로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반겨주는 엄마가 없어 무척 허전하고 외로움을 느낀 모양이다. 딸이 우리 엄마가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일기장에 쓴 것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 했다. 아들이 덕수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학제변경으로 시험이 아니라 은행을 돌려서 학교를 배정하는 제도로 바뀌었다. 아내의 꿈은 사라졌다. 아들은 대동중학교를 배정받았다.

나는 하급공무원으로서 적은 봉급으로 가정을 꾸려 나가기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시골집에서 쌀 한 톨 보태 주는 것도 없고 다른 곳에서 도움을 받을 곳도 없었다. 그래서 아내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가정을 꾸려 나갈 수가 없었다. 자라나는 3남매는 집에 있는 엄마를 그리워했지만 학교를 그만두라고 하지 못했다. 자식들을 키우는 동안 제일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아내였다. 아내의 성격은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다.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곧이곧대로 하지 않으면 잠을 못 잘 정도로 완벽주의에 가깝다. 남의 신세를 절대로 지지 않고 자기가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신혼 때 그 곱고 곱던 손이 바위같이 울퉁불퉁하게 손마디가 솟아올라 있다. 그런가 하면 아이의 어머니로, 학교 선생님으로 가정 살림을 하는 가정부로 남편의 아내로 불평은 있었지만 참고 가정을 일으킨 바다보다 넓은 마음을 가진 아내에게 늘 고맙고 정말로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성공한 것은 나의 아내 이숙재를 만나 결혼한 것이다.

공직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공직생활에서 성공해야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공직사회나 일반사회에서도 아는 사람도 없고 돌보아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나의 재산은 열심히 일하며 상사에게 또 주위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상사가 지시한 사항을 처리하기 위해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사무실에 나가 일했다. 사무실에서 마치지 못한 것은 집에 가지고 와서 일을 했다. 아내는 불평이 많았다. 일요일이나 휴가철에 가족과 같이 한 번도 휴가다운 휴가를 못가고 직장 일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남편으로서도 아이들의 아빠로서도 빵점이라고 늘 불평 아닌 불평을 하면서도 참고 이해해 주었다. 나는 정말 바보처럼 우직하게 앞만 보고 일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관선시장, 군수도 하고 민선 초대(1995~1998), 2대(1998~2002)에 걸쳐 군수 시장을 했다. 아내가 고생하며 참고 묵묵히 도와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내가 고생하며 키운 자식들은 건강하게 성장하여 큰아들 영규는 대학을 나와 한진해운회사에 공채로 합격하여 국내 근무보다 외국 근무만 13년, 스페인 네덜란드, 독일에 근무하며 유럽 본부장을 거쳐 한진해운 전무까지 했고, 손자는 1남 1녀를 두어 모두 외국에서 공부를 하였다. 큰손녀 자현이는 미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필라델피아 와튼대학(Wharton School University of Pennsylvania)을 졸업하고 미국 뉴욕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자산관리 회사인 블랙락(Black Rock)이란 회사에 합격하여 근무하고 손자 성진이는 영국의 러프버러 대학(Lough Borough University)에서 스포츠 매니지먼트(Sports Management)를 공부하는 대학생이다.

큰딸 혜원이는 숙대를 나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고 수원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다. 외손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여 회사에 다니고 외손자는 동국대학교에 입학했다.

가족사진

막내딸 혜영이는 대학의 아동복지학과를 나와 유치원 선생을 하면서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그 아들 정우가 초등학교 2학년(현, 4학년)때 동시를 쓴 것이 기특하여 이 글 뒤에 짤막하게 소개하려고 한다.

이제 우리는 젊었을 때의 꿈을 다 이루지는 못하고 자식에게 줄 유산도 없지만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도리는 다한 것 같다.

바보같이 우직하게 앞만 보고 정직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며 이제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일 모두 잊고 편안하게 살아가려한다.

 

<자료파일 제공  도서출판 헵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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