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한때는 생활의 터전이었던 기지촌 -제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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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한때는 생활의 터전이었던 기지촌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제46화-

 

용주골, 대추벌, 샘내, 곰시, 장파리, 선유리, 법원리 등 말만 들어도 미군이 주둔했던 기지촌의 추억이 담긴 부락들이다. 휴전협정이 내부적으로 추진되면서 서부전선의 평야지대와 서울의 근거리를 장악하기 위하여 북한은 산악지대인 동부전선을 거의 버리다 시피하고 서부전선에 총력을 기울여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우리도 서부전선을 방어하기 위하여 화력이 막강한 미 2사단과 7사단, 그도 부족하여 한국 해병대를 추가로 투입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서부전선에서 싸웠던, 미 2사단과 7사단의 부대는 북파주 전역에 분산 주둔되었다.

6.25 전쟁으로 인하여 한국 경제는 침체되고 민생고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그나마 파주 경제는 미군부대로 인해 생활에 숨통이 좀 트인 상태였다. 전국 각지에서 먹고살기 위해 파주로 모여들었다.

미군부대 내의 담배와 술 등은 물론 식료품의 수거 판매를 하거나, 부대 내 종업원으로 취업하기도 하고, 경비를 비롯하여 쓰레기처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생계유지에 큰 도움이 되었다. 미군 부대로 인해서 다른 지역에 비해 경기가 살아 있었다.

먹을 것이 없었던 가난한 시절, 미군부대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나오는 먹다 남은 고기를 모아서 끓여먹었다. 이를‘꿀꿀이죽’이라 했는데 꿀꿀거리는 돼지만이 먹을 수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없어서 못 먹던 시절이 그때였다.

‘부대찌개’는 미군부대 종업원이 음식물 쓰레기통에 소시지, 햄 등을 비닐봉지에 넣어서 쓰레기 관리인에게 넘겼고, 관리인은 이를 음식점에 팔았는데, 판 돈은 부대 종사원과 나누어 가졌다. 음식점에서는 부대에서 나온 소시지와 햄을 넣고 찌개를 끓여 팔았다. 부대에서 나온 재료를 썼다하여‘부대찌개’라 이름 붙였다.

부대찌개하면, 가난했던 시절 미군부대에서 얻어먹는 것을 상징하는 것 같아 이름을‘존슨탕’등으로 바꾸려고 무척 노력하였으나 이름이 바꿔지지 않았다.

1906년대 기지촌
1960년대 기지촌

이제는 토속음식으로 자리 잡아 부대찌개 간판을 걸고 전문적으로 영업하는 식당들이 많이 있다.

미군부대 장병들은 크리스마스나 기타 국경일에 대민지원 물건을 고아원 등에 지원하여, 파주에 16개소의 고아원이 난립 운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 2사단과 7사단이 동두천지구로 이전함에 따라 미군부대를 상대로 장사해 돈을 좀 번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지촌을 떠났다.

그렇지 못한 일일 노동자들의 대책 마련이 시급했다. 파주시는 그들에게 운전면허를 취득하도록 지원하였고, 창업이나 직업전환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여 도움을 주기도 했다.

미군과 주민이 떠난 지역 환경은 거의 폐허나 다름없었다. 그 후 기지촌은 정비사업을 통해 정리에 들어갔고 지금은 기지촌의 흔적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그때의 일들은 옛 추억으로 내 가슴 한편에 남아 있다.

며칠 전 파주시 용주골 기지촌 거리를 옛 기지촌 거리로 복원해 1,000만 관광객과 국내 관광객을 받자는 취지에서‘파주 용주골 주한미군 클럽거리 재현 콘텐츠 살려야!’라는 기사를 봤다. 향수를 살리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향수를 살리려는 그 노력만으로도 좋은 일인 듯하다.

 

<자료파일 제공  도서출판 헵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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