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를 졌으면 갚아야지 -제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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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를 졌으면 갚아야지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제45화-

미국 황진하 장군 관사에서

 

우리나라 안보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파주는 군사작전상의 이유로 파주 발전을 위한 새로운 사업을 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움이 많은 지역이다.

파주는 자유로와 통일로가 있고 제3땅굴과 도라산, 천연자원의 보고인 DMZ가 있으며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과 연계하여 초평도를 관광지로 개발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선 초평도 개발에 필요한 예산을 도에서 150억원의 지원을 받아 확보하였다.

1999년 임진강 대홍수로 초평도가 범람하여 완전 수중으로 묻히게 되자 초평도 매입을 중단하라는 도의원들의 주장에 대체 사업으로 임진각과 통일대교 사이의 토지를 매입하여 관광지로 개발하겠다고 도의원을 설득하여 동의를 얻어 지원금으로 20만평을 매입했다. 토지이용에 대하여 다각적으로 검토한 결과 이곳에 아울렛(outlet)매장을 개설하면 자유로나 통일로를 거쳐 서울에서 1시간 내에 올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아울렛은 1980년대 미국에서 탄생한 새로운 유통업의 형태로 이른바 메이커나 명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는 매장들을 한데 모아 몰(mall)을 형성하는 것이다. 파주시에 아울렛을 조성하려 해도 지역 특성상 군부대의 동의가 문제였다. 사전 군부대와 협의한 결과 임진각에 아울렛 매장을 건설할 때 자유로의 높이보다 낮은 건물을 지을 경우 가능하다는 판단을 받았다.

세계의 명품 생산회사를 장악하고 있는 미국 뉴욕에 있는 3개사를 선정하여 협의한 결과 미국에 와서 상세한 내용을 설명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의회의 민태승 의장과 나 통역원 3인이 가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현황과 연계하여 임진강변의 현황을 파워포인트 자료로 준비하여 뉴욕에 있는 회사를 찾아갔다.

1999년 6월 10일부터 19일까지 미국을 생전 처음 방문하는 길이었다. 미국에 가는 길에 한국에서의 한·미친선협의회 회원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황진하 장군이 어디에 있는지 문산종합고등학교 황인석 선생에게 근황을 물어 주미한국대사관 국방무관으로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래서 한·미친선협의회 회원의 부대 이름과 성명을 알려주고 주미한국대사관에서 초청하는 형식으로 소집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황인석 교장에 의하면 황진하 소령은 1978년 2월에 1사단장인 전두환 장군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어 1사단에 근무하면서 유창한 영어로 카터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이 한국 안보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미 상·하원의 방문과 미국방부장관을 비롯한 미국안보 담당 보좌관들이 방문하는 것을 일일이 브리핑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며 나와 만날 시간도 없을 때였다. 나와 황진하 의원과 만나게 된 인연은 황인석 교장을 통해서였다.

황인석 교장과 황 의원은 재당질 간으로 제일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에 황 의원의 동향을 자주 들었다. 황인석 교장과 나는 고등학교 선후배이며 1970년대 통일로 정비사업을 할 때 학교의 꽃을 지원하여 주고 꽃 관리 방법을 도와주어 더욱 각별한 사이였다.

황 의원은 전두환 1사단장이 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할 때 동행하여 보안사령관 수석부관으로 있으면서 10.26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고 보안사 합동수사본부의 임무를 보좌하면서 12.12 현장에서 우리나라 운명이 풍전등화로 소용돌이칠 때 꿋꿋하게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여 청와대 제1부속실 부속실장을 끝으로 군(軍)으로 다시 돌아와 미 육군참모대학에 유학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늘 존경하는 황인표 교장선생님께서 황진하 의원에 대해 자랑삼아 이야기 하는 것을 가끔씩 들었다. 황인표 교장선생님은 문산공립농업학교(현,문산제일고등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시고 서울의 여러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근무하시다가 정년이 되어 고향인 문산읍 사묵리로 낙향하였다.

그러나 황 교장선생님의 집은 임진강변의 독립가옥으로 정부의 취약지 대책사업의 일환으로 간첩의 은신처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철거되었다. 낙향하여 거처할 곳이 없어 철거된 옛 집터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거주하시면서 가옥을 신축하려 하는데 군부대에서 동의를 하지 않아 비닐하우스 생활로 노후에 엄청난 고생을 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 고통을 참아 가면서 군부대를 설득하는 데 나도 지원협조를 하였다. 하루는 1사단장인 송영근 장군을 만나 황 교장선생님의 딱한 사정 이야기를 하고 군부대 동의를 부탁했다. 독립가옥에 인근 군부대장과 직통전화를 놓으면 간첩 초소의 역할을 할 수 있으니 군사 동의를 하여 달라고 했다.

송영근 사단장님의 용단으로 새로운 집을 짓게 되었고, 지금도 군부대와 직통전화가 가설되어 있어 간첩초소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며 부대장이 바뀔 때마다 부대장이 꼭 방문을 하고 있다. 나는 출장갈 때마다 황 교장선생님의 집을 둘러 황진하 의원의 근황을 듣곤 했다. 그리고 내가 황진하 의원과 처음 만난 것은 1983년 미 육군참모대학을 마치고 1사단 58포병 대대장일 때이다.

테니스를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여 만든 경파회원을 문산읍 선유리에 있는 포병대대로 초청하여 그날 테니스도 잘치고 잘 얻어먹고, 좋은 선물도 받으면서 처음 만난 것이다. 그 후 황 대대장은 국군의 주요한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승진의 승진을 거듭하여 주미한국대사관의 국방무관(육군소장)으로 군사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은 뉴욕(New York)에서 3개사를 찾아가 아울렛 조성에 대한 설명을 열심히 하였지만 아직은 한국에 투자할 여건이 안 된다고 하여 모두 실패하였다. 우리는 워싱턴(Washington)으로 돌아와 황진하 장군에게 부탁한 한·미친선협의회 위원모임을 확인한 결과 어느 회원은 알래스카(Alaska)에서 사단장을 하고 어느 회원은 플로리다(Florida)에 있기 때문에 거리상 참석할 수가 없어 참석할 수 있는 회원 중에서 미 국방성에 동양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웰터 샤프장군부부(후에 샤프장군은 대장으로 승진하여 한국의 유엔군 사령관으로 근무하였음)와 모리스 대령 부부를 황진하 장군의 관사로 초청하여 모임을 가졌다.

내가 모임을 주체하려 했으나 주객이 전도되어 그날 저녁 파티 준비는 황진하 장군의 사모님이 준비하여 주시어 지금도 감사히 생각하고 있다. 그날 저녁에는 황인정 총무국장도 휴가기간이라 L.A 가족을 만나고 합석했다. 한국식으로 술을 주고받으며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대사관에서 전화가 왔다. 황 장군이 전화를 받으니 한국 연평도 근해에서 북한군과 우리 해군이 충돌이 있다는 보고였다.

그날이 1999년 6월 15일이다. 황진하 장군은 미국 정부와 협의를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며 급히 대사관으로 가고 우리의 파티는 매우 뜻 깊고 인상적인 모임으로 끝이 났다. 황장군은 미국정부와 한국정부와의 협의 등으로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에야 들어왔다. 우리 일행은 염치없이 황 장군님 관사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아직까지도 그날 사모님의 신세를 잊지 않고 있다.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L.A를 거쳐 라스베이거스(Las Vegas)를 가보기로 하였다. 라스베이거스를 가는 도중 아울렛 매장도 견학할 겸, 또 미국 대륙을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것에 비하면 육지로 가면서 보는 것은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격이지만 매우 뜻이 있는 것 같아서 관광버스로 일곱 시간이 걸리는 길을 택했다.

라스베이거스까지 일곱 시간의 버스를 타는 것은 지루한 감이 있었다. 마침 버스 안내원이 고양시 지도면(능곡) 출신이고 아직도 오빠가 살고 계시다는 말에 정감이 갔다.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안내원이 라스베이거스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바보가 되지 말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 이야기의 요점은 첫째, 도박도시에 관광을 와서 도박을 하지 않고 돌아가는 것은 바보다. 둘째, 돈을 따려고 도박하는 것도 바보다. 셋째, 잃은 돈을 찾으려 하는 것은 더욱 바보다. 도박도시에 왔으니 일정한 금액을 정해 놓고 재미로 즐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100달러를 바꾸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라스베이거스의 밤은 참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황홀한 밤이었다. 우리는 L.A로 돌아오는 길에 그랜드캐니언(Grand Canyon National Park)을 둘러보았다. 정말 우주 창생의 조물주가 그 넓고 자원이 많은 미국에 이런 것을 만들어 놓았을까?

우리나라에 이런 것이 있다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후버댐(Hoover Dam)에 도착했는데 그 규모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애리조나와 네바다 양주(州)에 걸쳐 있으며 콜로라도 강 하류의 홍수 방지를 위해 1930년부터 1936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1930년대 미국의 경제대공황을 제32대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New Deal) 정책의 일환으로 대 토목공사를 하였지만 1947년에 당초계획을 했던 31대 대통령 후버를 기념하여‘볼더댐’이라는 명칭에서‘후버댐’으로 개명하였으며 지금 미국의 유명한 관광지 중의 하나로 남았다. 우리 파주도 임진강과 60여 년간 잘 보존되어 있는 DMZ의 자연생태공원을 잘 조성한다면 세계적인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돌아왔다.

황진하 장군은 사이프러스 UN평화유지군 사령관의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나서 39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한나라당의 안보, 군사, 외교 전문가로 17대 비례대표로 정치에 입문했다. 한나라당에서는 외교, 안보, 통일을 담당하는 정책조정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이라크 파병문제를 비롯하여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반대를 주도하였으며 국가안보의 종합적인 판단과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는 등 안보, 군사외교, 통일업무에 최선을 다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지역구 의원으로 공천을 받아 출마하였다. 선거대책 조직을 하는 과정에서 황인표 선배님이 전화로 황진하 선거대책본부장을 무조건 맡아 달라고 일방적으로 지시하시고 전화를 끊으셨다. 잘 아는 후배이고 흉허물 없이 이야기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내가 이유를 대고 거부할 것 같으니 일방적으로 통지한 것 같았다. 황진하 의원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는 것에 대하여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었다.

하지 말라는 친구, 해도 관계가 없다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한나라당 내에서도 한나라당을 위해 한 것이 없는데 왜 하필이면 그런 사람을 선거대책본부장을 시키느냐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 갔을 때 너무나 많은 신세를 졌고 필요할 때는 이용하고 마음에 안 든다고 거부하는 것은 신의성실 원칙에도 위배되는 것이라고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황진하 의원이 전화가 왔다.

한 번만 지원하여 달라는 것이다. 황인표 선배님의 부탁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신세를 졌으면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누가 무어라 해도 동의를 했다. 황진하 의원은 18대 국회의원으로 지역구 파주에서 당선이 되었다. 바라건대 지역구 국회의원으로서 지역주민의 의견을 잘 수렴하셔서 법의 개정이나 제정을 통하여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힘써 주시길, 그리고 파주시민의 숙원사업 및 지역현안해결과 더불어 국회의원으로서 국가의 안보, 군사외교, 통일의 큰 국가사업에 소홀할 틈이 없이 국가 이익의 큰 틀에서 큰 일꾼이 되어 주시기를 기원할 뿐이다.

 

<자료파일 제공  도서출판 헵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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