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주인이다 -제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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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주인이다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제44화-

파주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아름다운 추억과 큰 꿈을 키우면서 살아온 사람과, 비록 파주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파주에 살면서 파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파주인이다. 나는 초등학교, 고등학교도 파주에서 나왔다. 농촌을 위해 일하겠다고 농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고향인 파주에서 17년 동안 근무하면서 파주의 구석구석을 안 가본데 없이 돌아보았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6.25전쟁의 상처가 그대로 남은 채, 부락은 기지촌 폐쇄로 폐허가 되었고 국가안보라는 이유 때문에 많은 통제와 규제에 발이 묶여 지역발전은 낙후되고 주민의 생활은 활기를 잃어갔다. 1995년 6월 27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지방자치단체장을 주민 선거로 선출하게 되었다.

당시 지방자치단체장에 출마할 것인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던 나로서는 처음으로 출마하게 되는 선거였다. 현실적인 문제로 선거에 나가면 돈이 많이 든다는데, 그 금액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어떤 정당을 택하여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다. 그뿐이 아니라 나의 가족은 나의 출마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출마하면 당선될 가능성은 있는 것인지? 고민 끝에 나는 당선의 가능성을 나름대로 분석해 보았다. 1971년 9월 8일 파주시 내무과장으로 부임한 이래 나는 새마을운동 주무과장으로 자연부락까지 다섯 번 이상을 순회하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주민과 만나 소통하고 그들을 지원하는 일에 주력해 왔다. 당연히 인지도는 높을 터였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을 위하여 통일로변 가시(可視)지역 부락을 거의 매일 같이 순회하면서 주민의 의사를 최대한 반영하기도 했다. 1979년 통일로변 주택 개량사업과 적가시지역사업(敵可視地域事業), 기지촌 정비사업 등을 통해 주민들과 만났고 상의하여 지원했다. 내무과장을 시작으로 부군수, 군수를 거치면서 10년간 주민을 위해 나름대로는 많은 일을 해왔다고 자부한다. 이권개입이나 권위주의적인 행동으로 주민의 빈축을 사거나 지탄을 받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러한 점을 종합적으로 미루어 보아 어느 정도 주민의 호응과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출마를 염두에 두고 몇몇 지역유지와 친지의 자문을 받았다. 모두들 당선이 가능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의견이었다. 처음에 부정적이던 아내 역시, 나의 설명을 듣고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자신감을 얻었다. 어느 정당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집권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을 선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국회의원인 박명근 의원을 찾아가 자치단체장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제시하고 나의 입당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이미 당의 부위원장이 출마의사를 표시하고 있어서 박 의원은 검토해 보겠다며 의사 결정을 미뤘다.

나와 부위원장을 놓고 누가 당선 가능성이 높은가를 당원들과 협의한 결과, 나를 선택하기로 결론을 내린 후에야 내게 통보를 해왔다. 자민당에 입당 뒤 선거운동을 자만하지 않고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열심히 뛰었다. 그리고 넝쿨회라는 사조직도 만들었다. 읍·면에 책임자를 두고 나와 뜻을 같이하는 주민들을 부락별로 모집했다. 넝쿨회는 서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유대를 갖고 엉키면 조직이 튼튼해진다는 뜻으로 조직을 하여 7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1995년 6월 27일 선거에서 68.3%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3년의 임기를 마치는 동안 파주군이 시로 승격이 되었고, 시 승격에 따른 조직 개편과 시로서의 사회면모도 갖추어야 하는 일과 일산신도시 개발에 따른 무질서한 개발 바람을 막아 가면서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1998년 6월 4일, 시장선거 출마를 앞두고 또다시 많은 고민들을 했다.

자민당의 이회창 대통령후보와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대통령후보 간 대통령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여당과 야당이 바뀌었는데, 어느 쪽으로 가는 것이 진정 파주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나의 체면이나 초심을 그대로 유지해서 야당시장이 되었을 때는 과연 파주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규제도 많고, 재정도 열악한 파주를 과연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나 홀로 고독한 고민을 해야 했다. 그러다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민당 당원과 나를 지지하는 100여 명을 초청하여 광탄면 마장리에 있는‘유일레저’강당에서 토의를 벌였다. 파주는 재정도 열악하고 규제도 많다. 야당시장으로 중앙 당국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월급만 받아먹는 시장이 되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1995년 제1대 민선군수 당선 축하연

 

여당시장으로 중앙지원과 도의 지원을 받아 파주발전에 기여하는 게 옳을 것인가? 그 양자를 놓고 갑론을박 장시간 토의를 하였다. 결론은 초심을 그대로 지키면서 야당이 된 자민당에 남는 것보다 당적을 바꿔 출마하는 게 좋겠다는 친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파주의 발전을 위하여 변절자라는 지탄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당선된 후에 당적을 바꾸는 것보다는 당적을 바꾸어서 출마하여 주민의 선택을 받으면 변절자가 아니라는 의견이었다. 왜냐하면 주민이 당이 싫으면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파주 발전의 주춧돌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솔직히 시장직에 좀 더 머무르고 싶었다.

주춧돌이 어느 정도 마련되고 나면 미련 없이 파주시장 자리를 내놓겠다고 약속하였다. 다음 날, 이재창 의원의 의사가 어떠한지 확인하기 위해 봉일천‘통일로식당’에서 나는 이 의원과 단둘이 저녁 7시부터 새벽 3시까지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이 의원이 당적을 바꾸지 말고 자신과 같이 자민당에 남자고 했으면, 아마도 이 의원의 의사를 그대로 따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파주 발전에 대하여 솔직하고 진솔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가만 보니 이야기는 나 혼자서만 하고 있었다. 이 의원은 간단한 말만 응수하고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어제 있었던 주민들과의 토의 내용을 보고받았던 모양이었다. 이미, 당적을 바꾸기로 하고 내게 형식적으로나마 뒷말을 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 의원이 도지사가 되기 전이나, 도지사가 되어 내게 베푼 은혜에 대해서 늘 고맙게 생각하고 멘토로 삼고 있었다.

민선1기 민주자유당 파주군수 후보 선거사무소 개소식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재창 의원과 인연은 60년 전인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기도청이 광화문에 있었을 때였다. 산업국 농무과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문산농업학교 동창생인 유직형 친구가 이 의원과 같이 도청으로 찾아와 도청식당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 의원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 후, 농정과지정계에서 농지분배 분쟁사건의 국가 소송업무를 담당할 때 이 의원은 도 법무담당관으로 있었다.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농지소송 수행자로서 법원에 제출하는 답변서를 쓰면서 법률상 자신이 없는 것은 늘 이 의원에게 지도를 받았다. 지정계장과 화성군 감사실장을 거치면서 지방행정 사무관이 되어 지방과 주민등록계장으로 있을 때, 이 의원은 사회과장으로 근무했다. 이 의원은 서울법대 동문인 김태경 지사가 부임하면서, 지사의 신임하에 경기도 인사를 우광선 지방과장과 같이 좌지우지했었다.

박명근 의원이 김태경 지사에게 부탁하여 나를 파주시 내무과장으로 지명한 것을 모르고 이 의원이 나를 내무국 다른 계장으로 전직을 시키려고 우광선 과장과 말다툼까지 하였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를 위해 마음을 써준 것을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1989년, 임사빈 전 도지사가 6개월간 파주군수로 근무하고 있던 나를 지방직으로 한 단계 낮추어 장안구청장으로 발령한 내용을 알고서도 나는 불평하지 않았다. 수원시 장안구청장을 거쳐 도시국장으로 있을 때 이 의원이 경기도 지사로 새로 부임했다.

내무국장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나를 선택하면, 파주 동향(同鄕)이란 점에서, 지방지 기자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까 싶어 이 의원이 고심했다는 것을, 도청 출입기자들의 말을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내무국장시절 지사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당시, 파주군수가 서서울골프장을 건설하고, 취득세를 과세하는 과정에서 현, 공시지가를 낮추어 주었다는 신문보도 등 여러 가지 주민들의 반발을 사는 일이 생겨 물의를 빚었다. 그래서 북부 제2청 감사과에서 감사를 하고 감사보고 사항은 곧 인사문제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내무국장인 내게 협조 사인을 받으러 왔다.

내용은 군수의 징계 요청이었다. 감사과장에게 지사의 결재를 받고 그 결과를 보고해 달라고 했다. 지사는 감사과장의 요구대로 징계를 결재했다고 보고를 하였다. 감사과장에게 잠깐 대기하라고 지시하고 지사실에서 “파주군수는 지사님보다 교하초등학교 2년 선배입니다. 같은 파주 출신 도지사가 파주 출신 선배 군수를 중앙인사위원회에 징계 요청하였다고 하면, 나중에 여론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이 지사에게 의견을 제시하였다. 지사는 이미 결재를 하였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게 맡겨 주시면 알아서 처리토록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대기했던 감사과장에게 지사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감사내용을 정정하여 경고 정도로 작성해 오라고 하고 군수 교체를 건의했다. 그리하여 지사는 파주 부군수를 지내서 파주사정을 잘 아는 여주군수와 파주군수를 맞바꾸었다.

1998년 7월2일 제2대 파주시장 취임

1990년, 예산편성을 할 때는 밤을 새워 가며 기획관리실장을 비롯한 예산담당관과 사업부서 국장, 과장이 배석한 가운데 지사의 가용재원으로 32개 시·군의 숙원사업 추가지원 계획을 세웠다. 제일 많이 지원한 곳은 수원시로 30억 정도로, 나머지 지역은 10억 원 내지 20억 원을 지원했다. 파주군의 지원 논의 차례는 새벽 3시경이었다. 파주군의 숙원사업 지원예산은 20억 정도로 군중에는 가장 많이 배정되었다. 나는 노골적으로“지사님의 고향이 파주인데, 이번 기회에 듬뿍 지원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경기도 지사를 평생하실 것입니까? 이번 기회에 뜻 있는 지원을 하시죠.”하며 건의했다.

이에 도지사는 무슨 사업을 지원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파주군 숙원사업 내용을 읊었다. 첫째, 통일로 영태리에서 금촌 시가지로 들어가는 새로운 길 개설 둘째, 파평면 금파리 배수시설의 용량 부족에 따른 증설 셋째, 문산읍의 도서관 건립비를 합쳐 총 70억 원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배석한 모든 국장들의 동의로 이재창 지사는 고향 파주 지원에 한몫을 했다. 후에 이재창 지사의 공로에 대해 많은 홍보를 하였다. 이 지사님은 1991년 고양군이 시로 승격하자, 나를 초대시장으로 발령하였다. 이 의원은 그 후, 환경청장을 지낸 경력으로 환경부장관이 되었다. 이 후 이재창 의원은 자민련으로 출마하여 당선이 되었다.

1998년 시장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 나와 이재창 의원 간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내가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로 당적을 바꿨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 의원은 자민당의 시장 후보가 마땅치가 않아 고민을 하면서 나를 원망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누가 나를 변절자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월급쟁이 시장이 아니라 미래의 살기 좋은 파주를 위하여 일하겠다는 내 충정 어린 마음이 당을 바꾸게 만든 것이다. 이 의원과 나는 파주를 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 동일하다는 것을 믿는다. 나는 여당의 시장으로서 파주를 발전시킨다는 것이고, 이 의원은 야당의 국회의원 입장에서 파주 발전을 돕는다는 것이다.

궁극의 목적은 파주를 발전시켜야겠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배를 탔지만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젓는 것과 같다. 누가 무어라 비난을 하여도 파주를 위하는 일에는 변함없는 파주인으로서 여당 시장이 되어 세 번의 수해로 인한 복구과정에서 3,488억 원의 지원을 받았고, 2회에 걸친 침수피해로 비만 오면 불안해하는 문산 주민을 위하여 항구적인 수해 항구 대책을 마련했다. 그 외, 하천개수, 금촌, 봉일천, 선유리, 금파리에 배수장 설치를 하는 등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민선 2대 파주시장을 거치면서 운정신도시조성, 금촌지구 택지개발, 환경기초시설 확충, 문화유적지 정비 등 파주시민과의 약속들을 나름대로 지키고 새로운 파주의 주춧돌을 놓았다고 생각한다. 당원들과 약속한대로 3선을 포기했다.

많은 시민들의 권유도 있었지만 젊은 후배를 위해 길을 비켜주는 것도 파주인이 해야 할 도리인것 같았다. 그리고 즉시 당을 탈당하여 자연인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파주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 미력이나마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흔쾌히 시정(市政)에 참여해 왔고 앞으로도 참여하려 한다. 왜냐하면 나는 영원한 파주인이기 때문이다.

 

 

 

<자료파일 제공  도서출판 헵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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