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 한 꾸러미와 만두가 안긴 공직생활의 보람 -제37화-

계란 한 꾸러미와 만두가 안긴 공직생활의 보람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제37화-

1961년 5.16혁명 이후, 나는 임시직 촉탁(囑託)에서 정식직원으로, 지방농업기원 보(補)의 직급에서 경기도 공무원 교관으로 차출되어 1년 만에 6급인 공무원 교관으로 승진하였다. 공무원 교육원의 교관생활을 마치고 1963년 지방행정 주사로 여주 공보실장을 하면서 행정직으로 바뀌었고, 1964년도에 한 계급 낮추어 도(道)로 전입하여 지방행정 주사보로, 농정과 지정계 차석으로 농지분배 사무를 담당하였다.

농지개혁법 시행령이 1950년 3월 시행되면서 농지분배가 유상몰수(有償沒收) 유상분배(有償分配)로 이뤄졌다. 농지 분배의 정의는 법적지목에 관계없이 현재 농지(전답)로 사용하면 농지로 인정하여 농지로 분배하였다.

농지의 소유 한계를 3정보로 정하고 3정보 이상의 농지 소유자는 3정보만 소유하도록 했다. 그 이상은 국가가 매수하여 보상을 상환증서로 주고 5년 균등 보상토록 하는 한편, 소작농을 하는 사람은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에 따라 자기가 짓는 땅을 유상으로 분배받고 5년 내에 토지대금을 농작물로 분할 상환하도록 하였다. 분배농지는 상환이 완료될 때까지 매매를 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런데, 농지분쟁은 소작농의 농지를 지주가 농지분배를 하지 못하게 환수함으로써 지주와 소작농 간의 분쟁이 발생하였다. 농지개혁법이 시행된 지 3개월여 만에 6.25 전쟁으로 농지분배 업무가 중단되고 휴전 이후에 농지분배를 다시 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각 시·군에서 제출되는 민원과 탄원, 그리고 소송이 제기되었다. 농지분배 업무도 끝나고 민원이 많이 발생하여 골치가 아프고 다 파먹은 김칫독에 냄새만 난다고, 농지업무를 담당하는 농정과 지정계에 가기를 다들 꺼려했다. 그러나 나는 법을 배울 겸 남이 가지 않는 자리를 지원했다.

국가를 상대로 하는 소송수행자로 지정되어 의정부지방법원, 인천지방법원, 수원지방법원 등 경기도 내에 있는 법원은 거의 다 순회하며 소송을 수행했다. 솔직히 말하면, 소송업무를 보면서 법률 공부를 많이 했다. 그 덕분에 행정을 해나가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처음 소송을 담당할 때에는 농지개혁법과 농지분배 진행철차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랬으니 소송을 수행하면서 법원 판사가 농지개혁법에 의한 농지분배에 대해 질문하면 제대로 된 답변을 못해 소송수행자의 핀잔도 많이 받았다. 상대방 변호사와의 대화과정에서 민법을 비롯한 국유재산법 등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웠다.

이천군 대월면 도리리의 한 농민이 소유권 이전등기 말소소송을 제기하여 현지출장을 나갔다. 면사무소에서 관계증빙 서류를 확인하고, 같은 피고인 농민을 면 직원과 함께 찾아갔다. 피고인 농민은 직사광선에 얼굴을 그대로 노출해 시커멓게 타고, 악수하는 손은 마디마디가 튀어나온 것이 평생 농사일만 해온 순수한 농부였다.

그는 이웃에 사는 사람(원고)이 돈을 빌려 달라고 하여, 한 번은 그냥 빌려주었다. 그런데 며칠 있다 도박을 하였는지 또 빌려 달라고 하여, 분배농지 1,500평과 분배통지서를 당시 농지 매매가격으로 매수했다. 미상환된 것도 분배받은 사람의 명의로 상환을 다하고 국가로부터 특별 조치법으로 소유권 이전등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전 농지분배 받은(원고)자가 매매 사실도 없고 농지상환도 자신이 낸 것이니, 특별조치법에 의한 중간등기 생략으로 타인에게 이전등기한 것은 불법이라며, 국가는 자신에게 이전등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피고인 농민은 농사만 짓는 사람으로 바깥세상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변호사에게 위임하여 소송을 할 것이냐고 물으니, 돈도 없고 못 한다고 했다. 사정이 딱한지라 같은 피고인인 내가 답변서를 대신 작성해 주고 직접 같이 소송을 하기로 하였다.

나는 농민(피고)에게 판사가“피고 답변하라”라고 물으면“네. 답변서 제출한 대로 진술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도록 교육을 시켰다. 재판 당일이 되어 피고인 측에 서서 나는 답변서대로 진술하고 피고 농민에게 판사가 물으니 그는 한 마디도 못했다. 나를 보고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만 물으니, 대신 답변할 수도 없고 난감했다. 그냥 교육시킨 대로 답변하라고 했더니, 농민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땀만 흘렸다.

판사가 도저히 소송을 진행할 수 없으니 재판은 다음으로 미루고 변호사를 선임하라고 하였다. 할 수 없이 변호사를 선임하기로 하고 경기도 부지사를 지낸 이백호 변호사 사무실로 갔다. 그간의 사실 이야기를 하고 변호사를 저비용으로 선임하여 소송을 진행했고, 결국 승소하였다.

경기도청이 광화문에 있던 어느 날, 누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복도에 나가보니 대월면 도리리의 그 피고 농민이었다. 그는 대뜸“송 주사님,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부터 했다. 나는 경기도청에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사무실에 들어가서 말씀드리겠다고 하여 사무실로 모셨다. 그는 아들이 인천에 살고 있는데 아들집에 가다가 송 주사님이 생각이 나서 인사 겸 고마움도 전할 겸 들렀다는 것이었다.

인사를 했으니 그만 가봐야겠다던 그는 짚으로 싼 계란 한 꾸러미를 책상 구석에 놓고 일어섰다. 나는 아들에게 줄 것을 왜 놓고 가냐고 했다.

“송 주사님께 드릴 것은 없고, 집에서 기른 닭이 낳은 계란이라도 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그러니 사양 마시고 받아 주세요”하는 것이었다.

인천 아들집에 가던 길이 아니라, 경기도청에 나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날을 잡아 찾아온 것이었다. 그의 마음이 진한 감동으로 박혔다.

‘송 주사’인 나를 생각하며, 전날 밤 계란을 꾸러미에 정성스레 담았을 것이고, 버스가 덜컹거리면 계란이 깨질세라 조심스레 계란 꾸러미를 안고 비포장도로를 달려왔을 것이다. 이천에서 서울까지 그 먼 길을, 서울 지리는 알지도 못하면서 어렵게 찾아와 전해 주고 간 계란꾸러미였다.

내 공직생활이 누구를 위해 일해야 함을 다시금 마음에 새겼다. 그의 마음과 정성을 5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한번은 1983년 안양부시장으로 있을 때였다. 과천에서 수원으로 가는 도시계획 도로를 확장하기 위하여 안양시 인덕원 사거리에 있는 주택 소유자에게 보상을 지불했다. 그러나 집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세입자들이 대책을 세워 달라고 데모를 하고 완강하게 버텼다. 수차례에 걸쳐 강제철거 통지서를 보내고 세입자를 설득하였으나, 반발만 더욱 심해졌다. 할 수 없이 강제 집행하기 위해, 도시과 직원과 철거인부 둘과 포클레인 등의 장비가 철거에 동원되었다.

세입자들은 힘으로 당할 수 없게 되자, 철거 중지를 하라고 시청의 부시장실로 몰려왔다. 세입자 앞에서 도시과장을 불러 눈짓을 하고 강제철거를 즉시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세입자를 붙잡고 시간을 끌었다. 그동안 직원과 철거인부가 주택철거를 완료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철거 중지를 명했다는 말로 세입자들을 돌려보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젊은 세입자가 차에 이삿짐을 싣고 시청으로 찾아왔다. 갈 곳이 없으니 시청에서 살아야겠다고 천막을 치는 것이 아닌가? 직원과 세입자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현장에 나가 직원들에게 그냥 두라고 했다.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냐 하는 생각에서였다. 세입자에게는 시청 뒤에 터가 있으니 천막을 치고 살라고 했다. 그는 정말로 천막을 치고 그곳에 살았다. 부인과 초등학교 다니는 자식 두 명의 네 식구가 그곳에서 15일 정도를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고양군수로 있을 때, 면회를 하려는 사람이 있다 하여 만나 보니 안양시청 뒤뜰에 천막을 치고 살던 바로 그 세입자였다. 그는 나를 보더니, 사무실 바닥에서 큰절을 하며 고맙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내 앞에 만두를 내놓았다.

나는 그간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었다.

“안양시에 살던 당시 부시장님이 천막 치고 생활하도록 해주지 않으셨다면 가족과 같이 자살했을지 모릅니다. 시청 뒤뜰에 천막이라도 치고 보름을 지내면서 궁리 끝에 고양군 원당읍으로 왔습니다. 이제는 자리를 잡아 자그마한 집도 장만하고, 아이들 학교도 잘 보내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노점상을 하고 있는데, 오신 손님 한분이 술을 드시면서 군수님의 이야기를 하길래 들어 보니, 안양시청에서 저를 도와주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빈손으로 올 수가 없어서 만두를 좀 만들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울컥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내가 고양군을 떠날 때까지 3년간, 추석이나 신년이 되면 음식을 만들어다 주었다. 나를 잊지 않고 고마운 마음으로 매년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는 정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직생활에 대한 보람과 신념을 바로 세울 수 있게 했던 이들이었다. 고마운 이야기들이 이 책에 더 많이 쓰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머릿속을 채운다.

 

<자료파일 제공  도서출판 헵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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