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근 의원 송덕비문은 누가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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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근 의원 송덕비문은 누가 쓰나?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제32화-

파주에서 4선 의원을 지낸 박명근 의원은 그를 좋게 생각하는 사람과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 안에서 많은 일화를 낳았다. 공약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는 중앙부처의 말단 직원에서부터 장관에 이르기까지 만나고 철저히 확인하는 비서 출신의 실무형 정치인이었다. 주민과 약속한 공약사업은 철저히 파악하여 집념과 강력한 추진력으로 밀어붙였다. 자기관리에 있어서도 철저하였다. 특히, 파주에서 정치에 도전하는 사람은 철저히 차단했다. 음주도 하지 않기 때문에 적당히 넘어가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철저하고 업무처리에 빈틈이 없고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권력을 가졌던 박명근 의원도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 없나 보다. 2004년 12월 9일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좋아하는 이들과 그 밑에서 정치를 뒷받침했던 이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파주라는 지역사회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니, 송덕비를 세우자고 했다.

송덕비를 세우는 것은 당연하지만 박 의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이들에게 비난의 빌미를 주는 것은 돌아가신 분에게도 예의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래서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난 후에 송덕비를 건립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로부터 4년이 더 지난 2008년 초,‘송덕비 건립추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문산읍장을 지낸 바 있는 김철영 읍장을 위원장으로 하여 열네 명의 위원과 뜻 있는 분들의 성금을 모아 송덕비를 세우기로 하였다.

송덕비문은 누가 쓸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한 끝에 생시에 가장 가깝고 박명근 의원을 가장 잘 아는 파주시의회 의장을 지낸 조경래 위원이 쓰기로 결정했다. 본인도 흔쾌히 승낙했다. 비의 재질은 오석으로 하되, 거북등에 용머리를 하기로 하였다. 글씨는 파주시 예총회장을 지낸 임제철 회장이 쓰기로 하고, 용미4리에 있는‘동문석재’를 방문해 송덕비에 쓸 돌을 골랐다.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점검 차, 위원회를 소집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러나 비문을 쓰겠다던 조경래 위원이 비문을 못 쓰겠다고 의사 표시를 했다. 그럼 진작 못 쓰겠다고 해야지 이제 와서 못 쓰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모든 위원이 그를 질책하였다. 누가 송덕비문을 쓸 것인가?를 놓고 논의한 끝에 내가 쓰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했다. 그러나 다른 위원 중에는 쓸 만한 사람이 없다. 다른 곳에도 적합한 사람이 없다. 그래도 박 의원과 친교가 있는 내가 쓰는 것이 좋겠다며 위원회가 결정을 해버렸다. 나는 할 수 없이 비문을 쓰기로 했다. 박 의원의 공적을 서면으로 임진강 유역 종합개발 사업에 투입된 자금을 확인하기 위하여 농진 공사에 문의해 확인하고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완성한 송덕비문은 위원회의 심의을 거쳐 법원읍 법원리 선영에 세워졌다.

 

송덕비문 [박명근 국회의원 송덕비]

先生은 1982年 9月 7日 京畿道 坡州郡 月籠面 英太里 199番地에서 父, 朴承年 氏와 母, 金鐘善 女史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聰明하고 意志가 굳세며 남다른 氣像과 大望을 품고 成長하면서 서울大學校 文理科大學 政治外交學科에 在學中 1950年 韓國戰爭이 勃發하자 學徒兵으로 參戰하여 銀星式功花郞勳章을 받는 빛나는 戰果를 올린 후 陸軍大尉로 豫編하였다.

先生은 1957年 公職을 始作하여 審計院(現 監査院). 財務部, 經濟企劃院을 거쳐 1967年 靑瓦臺 農林·建設擔富秘書官으로 朴正熙 大統領을 補佐하면서 우리나라 經濟發展의 大動脈인 京釜高速道路와 食糧 自給自足의 기틀을 만드는 데 中樞的 役割을 하였다.

先生은 보다 높은 理想을 가지고 國家發展에 奉仕하겠다는 信念으로 政界에 投身하여 1971年 故鄕인 坡州에서 第8代 國會議員으로 當選된 以來 9代, 10代, 14代의 4選 議員을 지냈다. 國會議員으로 活動하는 동안 國會 豫算決算委員會 委員長으로서 나라 살림을 구석구석까지 챙기는 責務를 다했다. 特히 故鄕 坡州를 남다른 愛着心을 가지고 農民의 所得增大를 爲해서는 가뭄과 洪水에서 벗어나는 것이 最優先策이라 生覺하고 豊富한 臨津江 물을 利用한 臨津地區 農業綜合 開發計劃 構想을 政府에 强力히 建議한 結果 1975年부터 8年間에 걸쳐 內資 363億 원과, 外資 109億 원을 投資하여 耕地整理를 비롯한 揚水, 排水場施設, 堤防工事 等으로 가뭄과 洪水 없는 肥沃한 農地를 만들어 農民의 所得增大는 勿論 生活基盤이 劣惡하고 落後된 農村의 生活環境을 改善하기 爲하여 接敵地區 開發事業, 基地村 整備事業, 統一路 周邊 整備事業, 廣域上水道事業을 政府가 投資하도록 誘導하여 坡州를 살기 좋은 고장으로 탈바꿈하는데 至大한 貢獻을 하였다. 한때, 大韓投資信託株式會社 社長으로 在任하는 동안 故鄕 젊은이들이 經濟界와 各界要路에 進出할 수 있도록 일자리 創出에도 獻身的인 勞力을 아끼지 않았다.

先生의 爲國忠情과 故鄕 坡州에 對한 熱情的인 사랑으로 이루어 낸 크고 작은 功德을 이루 헤아릴 수 없으나 그 業績을 記錄으로 남겨 後代에 傳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先生이 2004年 12月 9日 77才를 一期로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와 愛之重之 키워온 子息들과 同苦同樂했던 先後輩, 同僚들을 남겨 두고 떠난 지도 어언 4年이란 歲月이 흘렀으나 아직도 그분의 情趣가 우리 곁을 맴돌고 있어 그 崇高한 精神과 功德을 後世에 傳하고 싶어 당신을 좋아했던 사람들의 작은 精誠을 모아 이에 碑를 세우는 바이다.

2008年 12月 14日

牛步 宋達鏞 지음

雲巖 林濟喆 씀

 

<자료파일 제공  도서출판 헵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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