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었던 국유지 덕진산성을 되찾다 -제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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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었던 국유지 덕진산성을 되찾다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제28화-

 

어느 날, 장단이 고향인 후배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상의할 일이 있으니 꼭 만나자는 것이었다. 행사 없는 날을 정하여 오랜만에 만나 소주를 앞에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상의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후배는 초평도 맞은편 임진강변에‘덕진산성’이 있다고 했다. 어렸을 때, 매년 장단군민이 제사를 지내며 관리해 온 국유지로 알고 있는데 특별조치법을 악용하여 개인 명의로 등기 이전을 하였다며 분통 터져 못 살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한 잔 두 잔 술을 마시다 보니 거나하게 취한 상태가 되었다. 불법으로 이전 등기된 덕진산성을 환수하지 못한다면 시장으로서 무능하고 자격이 없다는 등의 농담 겸 진담으로 공갈협박 비슷한 수다를 떨고 그 후배는 돌아갔다.

다음 날 회계과 재산관리 담당자 이기용을 불러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철저히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파주시 군내면 장자리 13번지. 대동여지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 조선보물고적 조사자료, 파주군지 등에 임야 104.886㎡(31.728평)의‘덕진산성(덕진당)’이 기록되어 있었다. 파주시의 역사와 문화유적은 물론 덕진산성이 고려시대에 축조된 문화재라는 것도 밝혀 두고 있었다. 덕진산성은 사적가치 및 보존가치가 높은 건물로 한국전쟁 직전까지도 장단군민들이 제사를 지내는 등 그동안 관리해 온 국유지가 틀림없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토지조사령에 의해 측량할 당시인 1913년(대정2년)에도 국가 명의로 사정(査定)된 국가 소유의 땅이었다.

나는 국유재산을 찾기 위한 조치로 덕진산성이 수복지역 내 소유자 미복구토지의 복구등록과 보존등기에 관한 법률(이하 특별조치법)을 악용하여 불법등기된 국유지이기 때문에 이를 환수하기 위한 법무부장관의 소송위임장을 교부하여 줄 것을 건의토록 했다. 그러나 법무부에서는 우리나라는 등기우선주의이기 때문에 등기말소의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반려했다.

며칠 후, 법무부 소송담당 검사가 파주시의 국가소송 수행상황을 점검하기 위하여 시청을 방문했다. 아주 특이한 사례이다. 덕진산성 불법등기 말소건의를 반려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담당검사에게 덕진산성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국유지가 틀림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만약 불법등기의 증거가 부족하다고 하면, 인지사건으로 검찰에서 불법으로 이전 등기한 자를 소환하여 이전등기 경위를 조사하면 민사소송의 충분한 증거 자료를 확보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검찰에서 할 수 없다면, 우리 시에서 국유지를 환수할 수 있도록 소송수행 위임장을 발급하여 달라고 강력히 요구하여 위임장을 발급받았다.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사건번호 2000가 단6438호’로 소유권 이전등기 말소소송을 제기하여 2001년 9월 18일자로 승소하였다. 피고가 항소하였으나 서울지방법원‘사건번호 2001나 61592호’로 2002년 5월14일 항소기각으로 역시 승소하였고 피고는 더 이상 항소를 하지 않아 2002년 5월14일 국유지로 확정되었다.

특별조치법이 1982년 12월31일‘법률 제3627호’로 제정된 것은 6.25 전쟁으로 장단군에 보유하고 있던 토지대장과 지적도 그리고 개성등기소에 보관되었던 등기부가 모두 소실되어 미수복지구의 사실상 토지 소유자가 소유권 행사를 할 수 없어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제정한 것이다. 이 특별조치법에 의하면 미수복 주민이 소유권을 확인하려면 이 지역을 잘 아는 부락단위 보증인 3인을 면에 추천하게 되어 있었다.

당시, 군내면 출장소에서 임명된 보증인이 보증서를 발급하면 이를 근거로 보존등기 또는 이전등기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피고인은 이 보증 제도를 악용하여 덕진산성 토지는 망(亡) 부친이 타인으로부터 매수한 토지로 망 부친으로부터 상속받은 사실상의 상속인이므로 특별조치법에 따라 등기하고자 하니 보증서를 발급하여 달라고 했던 것이다.

보증인들은 소유권 취득에 관하여 아무런 근거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였기에 보증서의 발급을 거절했다. 며칠 후에 이 사건 부동산에 대한 진정한 권리자가 나타나면 증빙서류에 따라 적법조치를 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제출하여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보증서를 발급해 주었던 것이다.

이를 근거로 파주시 군내면 장자리 13번지 임야 104,886㎡(31,728평)의 국유 재산을 개인 명의로 불법등기한 것을 환수했다. 고향이 장단군인 후배의 제보가 아니었다면, 국유재산을 찾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역사적인 유적이 개인재산으로 사라질 뻔한 사건이었다. 덕진산성을 찾도록 제보해 준 후배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고 어려운 여건임에도 이 사건의 소송수행을 열심히 한 이기용 직원의 노고에도 감사와 격려를 보낸다.

덕진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고, 내성은 최고봉인 해발 65m 봉우리를 중심으로 산 능선을 따라 구축되어 있으며 내성의 전체 모양은 표주박 형태를 지니고 있다. 외성에는 두 개의 분지가 완연하게 남아 있고 성가퀴로 추정되는 부분이 두 군데 있다. 외성과 내성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강변으로 연결되어 배를 접안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덕진산성에 오르면 넓은 임진강 줄기가 시원스레 흐르는 것이 마음마저 탁 트인다. 덕진산성은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218호로 2007년 10월 22일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덕진산성에 얽힌 전설

 

바늘하나라도 잘못 훔치면 도적이 되어 죽을 수도 있지만 나라를 훔치면 영웅이 된다는 옛말이 있다.

인조반정(조선시대 1623년에 서인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일파를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사건) 당시 반정군 700명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한 장단부사 이서(李曙 1580-1637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이끈 군대가 반정군의 영웅이 될지 아니면 반란군의 수괴가 되어 주륙(誅戮)을 당할지 누가 알았을까? 그는 태종의 둘째아들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후손이었다.

1603년 무과에 급제한 그는 절제절명의 도박을 성공으로 이끈 뒤 완풍(完豊)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런데 덕진산성에 남아있는 덕진당에는 인조반정과 이서(李曙)의 부인이 관련된 가슴아픈 사연이 구전설화로 남아있다. 장단부사 이서가 반정군을 이끌고 출전하기 직전에 아내의 손을 잡았다. 성공한다면 1등 공신의 반열에 오르겠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할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 부인 내 반드시 성공하고 돌아오리다. 나라를 위한 일이니 걱정마시오. ”

이서의 아내는 눈물을 꾹 참았다.

“ 이번 거사가 성공하면 돌아오는 나룻배에 붉은 기를 걸어놓겠소. 만약 실패하면 흰 깃발을 걸터이니 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피하시오. ”

이서는 신신당부를 한 뒤에 700명의 병사와 함께 임진강을 건넜다.

이서의 아내는 남편이 떠난 뒤 뒤뜰에 단을 만들어 정화수를 떠놓고 빌고 또 빌었다. 그런데 떠난 남편은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일이 잘못된 것이다. 이서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예감했다.

그녀는 남편이 죽는 악몽까지 꾸고 점점 더 수척해져 결국 병이 들고 말았다. 남편이 떠난지 한달여가 흘렀을때 임진강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계집종이 외쳤다.

“ 마님, 나룻배가 다가오는데 무슨 깃발이 보입니다. ”

“ 무슨 깃발이냐, 붉은기냐, 하얀기냐 ”

강심(江心)을 벗어난 나룻배가 점점 다가왔다. 계집의 목소리에 힘이 떨어졌다.

“ 흰깃발이 옵니다. ”

이서의 아내는 핏기없는 얼굴로 산성앞 낭떠러지로 걸어가 몸을 던졌다. 나룻배에는 분명 남편이 타고 있었는데…

분명 붉은 깃발을 걸어놓았는데 그만 노를 젓던 사공이 더위를 참지못해 흰옷을 붉은 깃발에 걸었던 것이다.

이서의 아내가 몸을 던진 임진강은 하얀 물결을 일으키며 무심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서는 아내가 정화수를 떠놓고 빌었던 그곳에 덕진당을 짓고 아내의 원혼을 위로했다. 이후 임진강 어부들은 풍어를 기원하고 수재(水災)를 막기 위하여 덕진당에 제(祭)를 올렸다고 한다.

<자료파일 제공  도서출판 헵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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