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화석정’옆을 지나가는 37번 국도 -제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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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화석정’옆을 지나가는 37번 국도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제25화-

서울에서 한강과 임진강을 옆으로 끼고 자유로를 따라 가노라면 문산읍 당동리IC에서 동쪽으로 확 트인 4차선 도로가 나온다. 문산읍 임진리를 지나 파평면 장파리를 거처 적성면 두지리와 어유지리를 지나 연천군 전곡으로 연결되는 37번 국도이다.

이 4차선 도로는 적성면 구읍리 관골까지 완성되어 있고 이 공사가 완료되면서 낙후된 파평면과 적성면에 지방산업단지가 개발되고 다양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37번 국도는 기존도로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산을 헐고 들을 지나서 신설되는 도로이다.

그런데 파평면 율곡리 산 100-1번지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된‘화석정(花石亭)’이 있다. 이는 율곡의 5대조 되는 강평공(康平公) 명신(明晨)이란 이가 세종25년(1443)에 처음 세웠다. 그 뒤 성종9년, 율곡의 증조부 홍산공 의석이 중수(1478)하여 그 당시 명문이 높았던 몽암 이숙함에게 부탁하여‘화석정’이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정자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선조가 개성으로 몽진할 때, 칠흑 같은 밤중에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자 화석정에 불을 놓아 그 빛으로 임진강을 무사히 건넜다는 설이 있음) 80여 년간 빈터로 있다가 율곡의 현손 이후지 형제가 신축하였다. 그때 화석정이란 액자는 송시열, 박세채의 기문(記文)을 받아 작성하였다 한다.

그 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때 다시 불타는 수난을 겪었고, 1965년 파주의 유림과 군민들의 성금으로 재건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화석정이란 현판은 故박정희 대통령의 휘호다. 율곡 선생은 중종31년(1536) 강릉 외가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서울의 수진방(지금의 청진동)으로 옮겨와 살면서 가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선대가 사는 파주 율곡리에 자주 왕래하였다 한다.

여덟 살 때, 화석정에 올라 오언율시(五言律詩)‘화석정’이란 시를 지었다. 나는 이곳에 화석정의 시비를 세워 관광객으로 하여금 율곡 선생의 시상을 음미하도록 하였다. 시를 이곳에 옮겨 적어 본다.

 

화석정 시비

이러한 유서 깊은 화석정과 임진강 사이에 37번 국도 계획선이 확정되어 2000년도 건설교통부 산하 서울 국토관리청에서 공사 발주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 당시, 보존이냐, 개발이냐를 놓고 엄청난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화재보호법 제20조에 의하면 문화재 보호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는 문화관광부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화석정과 국도 계획선과의 거리는 47m 떨어져 있었다.

화석정은 지방문화재이기 때문에, 서울 국토관리청장의 문화재 보호구역 내 형상변경을 위한 경기도지사의 허가를 받아 달라는 요청서가 제출되었다. 문화유산인 화석정의 경관을 해치는 것도 아니고 문화재 보호에도 큰 영향이 없어 동의할 것이라 생각하고 경기도지사에게 허가를 신청했다.

경기도 지방문화재 심의위원회에서 심의한 결과, 그대로 보존하기로 하고 국도를 개설할 경우 노선을 율곡3리로 변경 시행하라는 권고결정 통보가 나왔다.

서울 국토관리청에서는 율곡3리로 변경할 경우, 도로법상 도로의 곡선반경(도로의 급격한 곡선은 시야가 가려 사고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 맞지 않아 교통사고 위험이 크기 때문에 노선변경을 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주장하였다. 심지어는 “도로법은 법이 아니냐?” 하면서 경기도 지방문화재위원회에서 동의하지 않으면 37번 국도는 교통량도 많지 않으니 우선순위를 뒤로하고 다른 곳으로 예산을 전용하겠다고 하였다.

만일 서울국토관리청에서 다른 곳으로 예산을 전용한다면 우리 파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인제 경기도지사에게 현장도 확인하지 않고 도면만 보고 심의 결정한 것이니 문화재 위원들이 현장을 확인하고 재심의를 할 수 있도록 회의를 다시 개최토록 하여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인제 도지사는 특별지시를 하여 파주시청에서 현장을 보고 재심의하도록 배려하여 주었다.

경기도 문화재 심의위원회가 파주시청 회의실에서 열렸다. 문화재 위원들과 함께 임진강 건너 동파지역에서 화석정을 바라보고, 또한 임진강변에 설치된 철조망을 일일이 답사하면서 화석정에서 더 떨어져 도로를 개설할 수 있는 여지는 없는지를 확인하고 돌아왔다. 회의실에서 갑론을박 끝에 터널을 뚫고 개설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토질이 터널을 뚫을 수 있는지와 이 지역은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군부대의 이동상 문제점은 없는지 협의해 보아야 했다. 탱크가 이동할 때 포신(砲身)이 통과할 높이는 얼마나 높아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놓고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심도 있게 검토하기로 하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폐회했다.

화석정 옆을 지나는 37번 국도

그날 저녁, 문화재 심의위원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국보1호인‘남대문’은 바로 옆 주변으로 자동차가 물결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세대학교에서 영천으로 넘어오는 금호터널을 뚫을 때에는‘독립문’을 이설할 것인가, 노선을 변경할 것인가를 놓고 사회적으로 많은 논쟁이 벌어졌었다. 결국, 독립문을 이설하고 개통하였는데, 화석정은 문화재 보호에 대한 하등의 이의나 문제가 없지 않느냐고 설득했다. 어찌되었거나 격론 끝에 37호 국도를 화석정에서 47m 떨어진 당초 계획대로 진행하되 시에서 제시한 절개지 처리를 철저히 하라는 의견과 더불어 지금의 37번 국도가 개설되었다.

문화재 위원에게 제시하였던 절개지도 계획대로 공사하여 문화재 보호에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오히려 절개지 처리로 발밑에는 임진강이 굽이치게 흐르고, 멀리 보이는 도라산과 송악산의 경관이 더욱 좋아졌다.

율곡 선생은 선조 17년 갑신년 정월 16일, 49세의 일기로 서울 대사동 자택에서 별세하시었고 지금은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 자운서원에 어머니 신사임당과 같이 영면(永眠)해 계시다.

 

 

 

 

 

 

 

 

<자료파일 제공  도서출판 헵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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