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 에드워드부대 내, 시한폭탄 매설소동-송달용 前파주시장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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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 에드워드부대 내, 시한폭탄 매설소동

-송달용 前파주시장 회고록<제10화>-

추위가 매서웠던 2000년 1월4일, 신년의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는 뜻에서 실장 및 국장들과 교하읍 당하리 설렁탕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조리읍 봉일천 4리에 있는 캠프하우스 미군 공병대 통역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월롱면 영태리 소재의 캠프 에드워드 미군 공병대대 내에 시한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미국 F.B.I 통보에 미 2사단 부사단장을 비롯하여 참모들이 모여 대책회의와 수색작업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즉시 저녁식사를 중지하고, 6시경, 캠프 에드워드 부대에 도착했다. 미 병사들은 이미 문산에 위치한 캠프 자이안트부대로 다 떠나고 마지막 병력이 버스에 타고 출발을 대기하고 있었다. 군견 두 마리가 남아서 구석구석을 수색하고 있었다.

 

캠프에드워드 부대 전경

 

나는 미 2사단 부사단장을 만나 사건내용을 확인하였다. 사건의 내용은 영태리 소재 캠프 에드워드 공병부대에서 근무하던 씨볼트(Sea Balt)란 사병이 제대하여 마약사범으로 구속되어 미국 프로리다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같이 근무하던 성명미상의 파키스탄계 사병이 2000년 1월5일, 1시경에 한국에 있는 캠프 에드워드 공병 대대에 폭탄과 유류탱크를 폭파시키기 위한 시한폭탄을 설치하였다는 말을 씨볼트가 듣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미국 F.B.I는 주한 미 8군사령부에 통보하였고, 이는 즉시 동두천에 있는 미 2사단 수색대를 경유하여 캠프 에드워드 부대에 통보되었다.

캠프 에드워드 공병 대대는 서부전선 미군부대의 폭탄과 유류 등을 보급하는 부대로, 당시 폭탄과 유류 3만3천 갈론(gallon)이 보관되어 있었다. 시한폭탄이 폭발하게 되면, 반경 2㎞ 내외의 인명피해는 물론, 큰 피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미군참모들의 말이었다. 그들은 계속 수색을 하고 있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상황을 매 시간마다 보고하여 주겠으니 사무실로 돌아가라고 했다.

사무실로 들어와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재난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상황실을 설치하고 다음과 같은 대책들을 실행했다.

첫째로 전 직원을 비상소집하는 일이었다.

둘째로는 최악의 경우에 주민 이동 명령에 대비하여 월롱면장을 근무하도록 하였다. 폭발물 영향이 미칠 수 있는 영태1~5리의 이장들로 하여금 주민 이동 명령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사전 홍보토록 하였다. 이장(里長)은 주민의 대혼란을 피하도록 하고 마을 방송시설이 있는 곳에서 대기하도록 하였다.

셋째로는 경찰서와 협조하여 통일로의 교통 통제계획을 요청했다.

넷째로 임창열 도지사에게 캠프 에드워드 부대 상황을 보고하였다. 임지사는 즉시 소방본부장에게 경기도내 화학소방차를 파주시에 지원토록 지시하였다.

다섯째로는 교육청과 협의하여 월롱초등학교와 도내초등학교에 주민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여섯째로 광탄면 용미4리에 있는 스티로폼공장 사장에게 통보하여 스티로품을 학교 교실에 깔 수 있도록 지원 요청하여 즉시 운반하였다.

마지막으로 대한적십자 경기지사에 취사용 차량이 즉시 나올 수 있도록 사전 협의하였다. 경기도 소방본부장이 도내 화학소방차량을 동원하고 직접 현장에 와서 밤 23시에 영태리 부대를 방문하니 미군이 전부 문산으로 이동했다는 보고를 나에게 하는 것이었다.

밤 23시 30분경, 미군은 시한폭탄을 찾지 못하고 한국경비원 24명만 남겨둔 채로 문산에 위치한 캠프 자이안트 공병부대로 모두 철수하였다. 우리 시에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자기네들만 떠난 것이다.

상부 지시나 연관 관계부서의 협의 없이 단독으로 주민 이동 명령 여부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였다. 추운 겨울 날씨에 곤히 자고 있는 주민을 깨워 이동하였다가 만일, 시한폭탄물이 매립되었던 게 아닐 경우, 주민에게 고통과 불편을 주는 것은 물론 주민들의 반발을 또 어떻게 무마할 것인가도 문제였다.

그러나 혹시라도 폭발물이 폭발할 경우를 생각한다면, 주민의 고통과 불평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주민을 이동시켜 재해를 예방하는 것이 옳다고 결론을 지었다. 상부에 현 상황을 보고하였는데도 하등의 조치가 없었다. 2000년 1월 5일, 01시 10분에 단독으로 주민 이동 명령을 발령하였다. 그리고 관계기관에 통보하였다.

일부 주민들은 불평 없이 자진해 이동을 하는가 하면, 노약자와 일부 주민들은 이동을 거부했다. 새벽 2시 30분 시청직원을 현지에 파견하여 독려함으로써 월롱초등학교에 143명, 도내초등학교에 744명, 총 917명의 주민을 새벽 3시 50분에 대피 완료했다.

경기도 소방본부장이 직접 동원한 화학소방차 4대가 이미 시청 앞 도로에 대기하고 있었다. 통일로 교통통제는 서울에서 문산으로 내려오는 차량은 등원리, 낙머리 삼거리에서 도내리 방향으로, 문산에서 서울로 가는 차량은 월롱파출소에서 덕은1리 방향으로 우회토록 조치하였다. 열차는 철도청과 협의하여 5시 20분, 첫 열차부터는 금촌역까지만 운행토록 조치하였다.

새벽 5시 30분경. 대한적십자 경기지사에서 급식차 2대(1,000명 분 급식 가능)와 모포 295매가 도착했다. 전 직원들은 한밤중에 상점 문을 두드려가며 라면·치약·칫솔·수건 등 12종 3,000여 점을 확보하여 나름대로 비상사태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1월 5일 9시 20분경, 국정원으로부터 미 F.B.I의 재확인한 결과 파키스탄인이 진술한 것이 허위사실임을 통보 받았다는 전화가 왔다. 이로써 가상훈련이 아닌 긴박했던 실제상황은 끝이 났다.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한편, 밤새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닌 것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었다.

1월 5일 9시 30분에 주민을 즉시 귀가 조치했다. 모든 상황 해제를 관계기관에 통보했다. 바로 그때 미 2사단장인 로버트 에푸디스(Rober t. F. Dees) 장군의 전화가 걸려왔다. 미 F.B.I에서 허위사실로 통보는 왔지만 좀 더 확인이 필요하니, 주민의 귀가를 14시까지 유보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이 캠프 에드워드 부대를 떠나면서 지역주민의 안전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만 떠났으면서, 이제 와서 주민의 귀가를 유보해 달라고 할 자격이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후일, 미 2사단장은 전 주민에게 사과하였다.

나는 위급한 때에 지역주민들이 일사불란하게 대피에 협조해 준 일에 대해 감사하며, 고통과 불편을 드린 점 깊이 사과드린다는 서신을 각 가정으로 보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만일, 시한폭탄이 매설되어 폭파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주민을 이동시키기 위해 공무원을 현장 투입하는 과정에서 시한폭탄이 폭발하였다고 하면 또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눈앞이 깜깜한 일인 것이다. 가상훈련이 아닌 시나리오 없는 실제상황을 생각하니 긴박했고 숨 막히는 시간이었다. 해당 지역주민들 역시 흐르는 세월 속에 나처럼 문득문득 그때의 소름 돋던 새벽을 떠올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자료파일 제공 :  도서출판 헵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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