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국립호텔 혜음원지를 찾아서

 

지난 겨울에는 몹시 가물어서인지 3월이 되었지만 봄의 새싹이 보이지 않는 화사한 날에 서울 시립묘지 근처 광탄면 용미리에 있는 고려시대 국립 숙박시설인 혜음원지를 찾았다.

이 곳은 고양시와 파주시 경계 부근으로 서서울 골프장 아래 쪽에 위치해 있으며 옛날 서울-광탄-임진강 나루-개성-평양을 오가는 국도1호선이라 할 수 있는 도로에서 3~4백미터에 동쪽방향에 위치한다.

보낸 사람 역사문화

혜음원지를 가려면 서울시립장례예식장에 들어 가는 길에서 동네 사이에 있는 1차선 도로로 들어 가야하는데 왼쪽으로는 산을 돌아서 차량으로 갈 수도 있고 우측 소로길을 따라 청룡사절 앞으로 혜음원지 입구를 찾아 갈 수 있다.

이 곳 혜음원은 1122년 고려 예종때 완공된 여행객 숙소로 당시 수도인 개경에서 남쪽으로 약 50여km 정도 거리에 위치하며 남경(지금의 서울)과는 20여km 거리에 위치한다.

당시 남경은 예종의 선왕인 문종이 동경(지금의 광주)을 대신하여 남경에 신궁을 건설하면서 서경과 개경을 합하여 3경을 만들었고 영남지방을 내려가기 위해서 통과해야 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옛날 개경에서 남경에 볼 일이 있으면 새벽 밥을 해먹고 임진강을 도강하여 부지런히 걸어 야만 해질 무렵에나 혜음원지 부근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곳은 산세가 높고 인적이 드물뿐만 아니라 산적이 출현하여 혼자서는 혜음령 고개를 넘지 못하였다.

이 혜음령 고개에 대한 전설에 따르면 산적 두 명이 어느 날 많은 물건을 빼앗게 되자 술을 한 잔 먹고 분배하자며 한 산적이 마을로 술을 사러 내려가 술에다 독약을 타서 왔는데, 남아 있던 산적이 숨어 있다가 올라 오는 산적을 죽이고 빼앗은 물건을 모두 가지려고 했다. 그러나 목이 마르던 산적은 죽은 산적이 갖고 있던 술을 마시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혜음원 건립에 대하여는 김부식의 「혜음사신창기」에 남아 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1105년에 예종이 즉위하고 1109년 가을 8월에 측근의 신하인 이 소천이 임금의 사명을 받들고 남쪽 지방에 갔다가 돌아왔다. 임금께서 “이번 길에 민간의 고통스런 상황을 들은 것이 있느냐” 물으시니,

“봉성현에서 남쪽으로 20리쯤 되는 곳에 조그마한 절이 있었는데, 허물어진지 벌써 오래였으나 지방 사람들은 아직도 그곳을 석사동이라 곳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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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방에 있는 모든 고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이라든지 또는 위에서 내려가는 사람이 모두들 이 길을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깨가 서로 스치고, 말은 굽이 서로 닿아서 항상 복잡하고 인적이 끊어질 사이가 없었는데, 산 언덕이 깊숙하고 멀며, 초목이 무성하게 얽혀 있어서 호랑이가 떼로 몰려다니며, 안심하고 숨어 있을 곳으로 생각하여, 몰래 숨어서 옆으로 엿보고 있다가 때때로 나타나서 사람을 해친다고 합니다.

이 뿐 아니라 간혹 불한당들이, 이 지역이 으슥하고 잠복하기가 쉬우며 다니는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하여, 여기에 와서 은신하면서 그들의 흉행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올라오는 사람이나 내려가는 사람이 주저하고 감히 전진하지 못하며, 반드시 서로 경계하여 많은 동행자가 생기고 무기를 휴대하여야만 지나갈 수 있는데도, 오히려 살해를 당하는 자가 1년이면 수백 명에 달합니다“고 보고하였다.

임금께서는 측은히 이를 딱하게 생각하시고, “어떻게 하면 폐해를 제거하고 사람이 안심하게 할 수 있느냐” 하셨다. 아뢰기를, “전하께옵서 다행히 신의 말씀을 들어주신다면 신이 한가지 계교가 있사온데, 국가의 재정도 축나지 아니하며 민간의 노력도 동원시키지 않고, 다만 중들을 모집하여 그 허물어진 집을 새로 건축하고 양민을 모아들여 그 옆에 가옥을 짓고 노는 백성들을 정착시키면, 짐승이나 도둑의 해가 없어질 것이며, 통행자의 난관이 해소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께서는, “좋다. 네가 그것을 마련해 보라”하셨다.

이와 같이 혜음령 고개는 군사를 동반한 왕이나 관리들의 통행에는 큰 위험부담이 없었으나 민간인의 통행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곳으로 보여진다.

이 소천은 왕의 명령에 따라 묘향산에서 혜관스님을 찾아가 승려 1백여명과 경비를 마련하여 1120년2월에 착공하여 2년만인 1122년 2월에 완공하였으며 그후 왕이 남경 순행할 때를 대비하여 추가로 왕이 숙박하는 행궁을 설치했다고 하나 시기는 알 수 없다.

당시 사찰에서는 중요 교통로변에 숙박시설인 원을 결합한 사원을 운영해 왔는데 신도들이 희사한 미곡으로 이자를 받아 여행객에게 죽을 쑤어 급식하였다.

혜음원지는 동,북,서쪽이 산으로 둘러 있고 남쪽으로는 트여서 혜음령으로 올라 가는 도로가 보이는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하며 6천평 정도의 부지에 계단식으로 건물이 지어져 있다.

동쪽과 서쪽의 계곡 사이의 개울에서는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햇살에 번득거리고 발굴되지 않은 논 바닥에는 봄 빛이 한 창이이었다.  왼쪽 논길로 7~80m 올라서면 발굴지 하단 부분이 나타나고 그 위로 넓게 들어서는 곳곳에 초석과 장대석이 보이는데 천년이 된 보석을 만났것 처럼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헤음원지는 이곳 주민이 1999년 폭우로 인하여 이 지역의 상단부터 토사가 흘러내리면서 「혜음원」이라는 문구가 양각된 기와를 발견하면서  천년 동안 잠들어 있던 고려시대의 문화유산을 찾아 내게 된 것이다.

혜음원 왼편에는 계곡과 인접하여 우물이 있는데 아직도 물이 가득하고 이 부분이 부엌이 있는 곳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이곳으로 연결되는  화강암 계단은 얼마나 많은 식솔들이 다녔는지 아직도 반질반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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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음령을 지나 다니는 수많은 여행객에게 음식을 접대하기 위해서 하얀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수 없이 드나 들며 이마의 땀을 닦아 내던 곱단이가 생각나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혜음원지의 좌우 계곡을 중심으로 중앙에 나 있는 계단식 통로를 보면 상당히 큰 규모의 시설임을 한 눈에 느낄 수 있게하고 중간 정도에 들어서면 청석이 바닥에 장식되어 있고 화강암 초석에 십자가 모양의 음각이 파졋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곳은 정확하지 않으나 윤장대가 있어 한 번 돌리면 불경을 한 번 읽는 다는  불교적인 의식을 행한 장소로 보고 있다.

동쪽 상단 끝 부분에는 왕이 유숙하는 행궁이라는 장소가 1백여평 규모로 자리잡고 있으며 초석이 궁궐 방식처럼 좌우대칭의 형태를 갖추고 담장이 견고하게 설치되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왕의 남경 순행은 많은 군사와 신료들이 동행하고 있어 왕이 유숙할 때의 이 곳은 가장 흥청되고 마을의 큰 행사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행궁과 담장 사이에는 커다란 우물지가 있는데 현재는 물이 고여 있지 않지만 발굴시에는 물이 많이 나왔다고 하며 배수로를 따라 아래 쪽에 내려가면 동쪽 산 비탈을 이용하여 물이 낙차하도록 되어 있는 곳이 있다.동쪽 산비탈에서 내려오는 물은 널찍한 바위에 포석정처럼 물길을 만들어 배수로에 다시 떨어져 북쪽 배수로와 합쳐저 병목 모양으로 문을 열고 닫게한 부분에서 일정량이 담수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이 곳은 건물 뒤편이고 동편 담장 아래에 위치할 뿐 아니라 담수되는 한 가운데에 긴 장대석이 있는 것을 보면 이곳에서 빨래를 하거나 목욕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된 것 같다.

동쪽 배수로에서 약간 아래로 내려 오면 폭6m 길이 15m 정도되는 면적에 지상보다 약간 높은 초석이 일정하게 설치되어 있는데 이곳은 서울의 경회루처럼 누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누각 아래에는 북쪽과 동쪽편에서 내려오는 물이 다시 모이는 곳으로 동편 산에 노송이 우거져 있고 남쪽으로 혜음령이 훤하게 내려다 보여 왕이 행차할 때면 지역의 호족과 함께 연회가 베풀어졌을 것으로 상상된다.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주로 고려시대 자기와 기와편으로 완성된 유물은 드물고 15cm 정도 크기의 휴대용 불상이 발견 된 정도이다.

기와들의 양상을 보면 고려시대 기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 이전시대로 올라가는 기와들은 출토되지 않았다. 또한 동일층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조사된 지역의 건물들은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경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와들은 평기와류와 막새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상당량의 명문기와와 특수기와가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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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새류 중에 명문이 새겨진 것은 암막새이다. 명문암막새는 막새면 좌우에 귀목문을 두고 그 사이 중앙에 세로로 “惠蔭院”이라 양각하였다. 글자체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하나의 글자판형으로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막새류는 연화문 수막새가 일부 출토되기도 하였지만 고려시대 전형적인 귀목문 수막새와 암막새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연화문 수막새는 크기와 문양에 따라 2종류가 출토되었는데,  특수한 용도를 위하여 제한적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막새는 막새면 직경에 따라 크게 대․중․소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며, 문양이나 용도에 따라 10여종으로 분류된다.

출토된 자기류는 주로 고려청자이며 중국산 자기와 분청사기도 일부 나타난다. 청자는 태토와 유약이 정선되었으며 규석을 받쳐 갑발안에서 정성스럽게 구운 고급청자가 많다. 그리고 지방가마에서 번조한 조질청자도 드물게 있다. 종류는 완, 대접, 접시, 바리떼, 잔, 뚜껑, 두침 등이 확인되고 있는데, 주로 완, 대접, 접시가 많다. 시문되어진 문양은 무문, 음각, 양각, 상감, 퇴화 등 다양한 기법이 사용되었지만 대부분 음각으로 구성했다

혜음원지는 출토된 유물이 주로 낮은 배수로 쪽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당시 시대 이후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화재로 기와편 등이 붉은 색을 띄고 있어 몽고군 칩입시 대규모 화재로 폐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 혜음원(사)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11 파주 역원조와 고적조에에 보이고 있다. 고적조에는 「고혜음사」라 기록되어 사찰은 이미 없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역원조에는 혜음원이 그대로 있어서 院의 기능은 유지가 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 사찰에서 운영하던 원을 모두 국유화하는 과정에서 혜음원도 국유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사찰이 없어지고 원의 기능만 남았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시대 혜음원의 규모는 고려시대에 비하여 축소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혜음원부근에 분수원(파주 남쪽 24리), 광탄원(파주 남쪽 10리) 등이 있었다. 특히 분수원 파주에서 고양으로 넘어가는 길에 있었기 때문에 혜음원과 지근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권 39 세가 39 공민왕 10년조에 의하면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여 남행할 때, 임진강을 건너서 도솔원→분수원→사평원 등을 거쳐서 광주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공민왕이 혜음원에 머물지 않고 주변에 있는 분수원에 머물렀던 것이다.

혜음원에 행궁이 있었다면 공민왕이 분수원에 머무르지 않고 혜음원에 머물렀을 것으로 생각되며 혜음원은 이미 공민왕 10년 이전에 12세기의 모습을 상실하였고 분수원 보다도 규모가 작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계곡에 고사목과 함께 추춧돌이 뒹구는 이곳은 우리 선조의 애환이 물들어 있어 바쁜 일상을 잠시 있고 고려의 흥망성쇠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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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왕건이 태봉의 왕인 궁예의 부하로 있다가 호족세력을 배경으로 918년 포악한 궁예를 추방하고 왕위에 올라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으며, 935년에신라를 병합하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격파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성취했다.

그 후 거란과 몽고의 침입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고려 25대 충렬왕때부터는 몽고의 간섭을 받아 왕의 이름 몽고에 충성을 한다는 뜻으로 충(忠)의 이름을 붙이는 비운의 시기도 있었으며 요동정벌을 반대하였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 역사를 종지부 찍게 한 사실은 숱한 역사의 윤회를 느끼게 한다.

오늘은 햇살이 따스해서 인지 도로변 인근의 밭과 논둑에서 봄나물 캐기에 여념이 없는 아낙네들을 보니 1천년 전의 풋풋한 아낙네를 만난 것처럼 바람이 향기롭다.

천년을 잠들었던 조상들의 역사를 다시 돌아 보면서 비운의 역사를 업보로 갖고 태어난 우리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며 완연한 봄 속으로 돌아 간다. <2008.11.30 이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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