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다리, 그 진실을 알고 싶다

Last updated on 2017-10-29

자유의 다리는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 광장 앞 망배단 뒤편에 놓인 길이 83m, 폭 4.5~7m, 높이 8m인 목재 다리로 1953년에 한국전쟁 포로 12,773명이 자유를 찾아 귀환하였기 때문에 명명된 다리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1952년 3월에 촬영된 가설교를 근거로 지금의 자유의 다리는 관광용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본래의 자유의 다리는 임진강을 횡단하는 목조 가설교로서 1953년 8월3일부터 9월6일까지 33일 동안 포로교환 당시 이용되었고 그 후 장마와 홍수로 유실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포로교환은 정전협정에 따라 판문점에 이루어졌으며 당시 한국은 휴전에 반대하였므로 협정 당사국이 아니라서 유엔사가 포로를 인수하여 이 자유의 다리 북단까지 트럭으로 수송해 한국군에게 인계하였다고 한다.

그 동안 이 문제에 대하여 명확하게 근거를 제시하여 반박하거나 새로운 주장은 없었다. 그 것은 한국전쟁 당시의 자료가 불충분하고 본격적으로 연구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낸 사람 근대문화

최근 여러 자료를 통하여 자유의 다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2005년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발행한 한국철도건설백년사에 임진강 교량의 복구공사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임진강 교량은 연장 701.84m의 강철 교량으로서 경간 60.6m의 트러스형 8개와 그 보다 짧은 규모의 18.3m의 판형 10개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임진강 철교는 한국전쟁 중에 폭격으로 트러스8개중 3개가 추락되고 5개가 파손되었으며 판형은 1개가 추락되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전쟁은 국지전으로 전환되었다. 미군은 전쟁의 확전을 원하지 않고 현상태 유지를 희망하면서 같은해 10월25일 휴전회담장을 판문점으로 이동하였고 12월8일에는 쌍방이 포로명단을 교환하였다.

 

전선이 어느정도 정리되면서 군수물자 수송과 포로교환이 필요하자 미군 당국과 남한의 교통부가 합동으로 1952년 3월 1일부터 임진강 철교를 복구하기 시작해 같은해 6월25일까지 117일간 공사 끝에 복구를 완료하였다.

 

이 공사는 트러스 1개를 신규 가설하고 2개를 수리하는 것으로 미군 제84공병대대가 하부구조와 아이빔 2개를 설치하는 공사를 맡았다.

공사중에 침몰된 기중기를 교통부 공사사무소 직원이 자발적으로 인양해 주자 5월15일에는 미8군 사령관이 감사장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이 복구 공사에는 공사비 948,148,489환, 노력비 332,550,500환, UN군공급 재료비 427,589,639환, 교통부부담 재료비 427,589,639환이 소요되었으며 연인원 33,707명이 참여하였는데 재료비는 아마 UN군과 한국이 50:50으로 부담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철도백년사의 복구 기록에 따르면 당시 임진강 철교는 서울~판문점간 자동차용 도로 교량으로 복구되어 휴전회담 관계자의 통행에 이용되었고 포로교환 당시에도 포로들이 트럭으로 이 곳을 통과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자유의 다리는 현재 연장 83m 목교만이 아니라 철교를 포함하여 전체 784.84m가 자유의 다리인 셈이다.

 

그러나 몇 가지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한국전쟁 당시에 찍은 2개의 사진중 하나는 파일명이 freedomgate_brige19520310.jpg로서 1952년 3월 10일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사진 하나는 임진각 지하에 전시된 1953년 4월이라고 기록된 라벨이 붙어있는 사진이다. 1952년6월에 임진강 철교를 복구하여 사용하고 있다면 굳이 가설교를 설치할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가설교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지금의 목교인 83m 자유의 다리를 복구된 임진강 철교와 연결했어야 할 필요성과 목교 구간만을 ‘자유의 다리’ 지칭한 것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지 않는다.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출처와 촬영자, 촬영시기는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한국전쟁 당시 찍은 2개의 기록사진을 보고 다리의 위치와 방향을 분석해 보았다.

 

보낸 사람 근대문화

1952년 3월 사진을 보면 교각과 교각사이의 긴 60.6m 경간이 앞 쪽에 있고 짧은 18.3m 경간이 멀리 있는 것이나 임진강 남쪽이 평야 지대인 것으로 보아 이 사진은 임진강에 인접한 북쪽의 산에서 남쪽 방향을 내려다 보며 촬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1953년4월 사진도 같은 위치에서 북쪽에 가까이 찍은 사진인 것으로 보인다. 두 사진의 다리 상부의 난간과 하부의 교각의 구조가 유사한 것으로 보아 같은 다리로 볼 수 있다.

가설교의 위치도 판단이 쉽지 않다. 현재의 임진강 철교는 하행선으로 폭파된 동쪽의 상행선과는 80m 이상의 간격이 있다. 그러나 1952년3월 사진을 보면 가설된 목교가 폭파된 상행선 철교와 4~50m 정도 이격된 것으로 추정 되지만 예상되는 지점에 폭파된 하행선 철교가 보이지 않는다.

 

또 가설교 남쪽 하단에는 공사중이고 기존 철로로 이용되었던 제방 흔적이 보이고 있어 이 위치가 지금의 철교 위치라고 추측할 수 도 있으나 가설교 높이가 상행선의 중간 정도로서 폭파된 교각 상단보다 낮아 폭파된 하행선을 복구하는 것으로 볼 수 없을 것 같다.

지금의 통일로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마정리 마을 안쪽에 서울로 연결되는 국도1번 도로가 있었다. 임진강 철교를 복구하고 마정리 국도1번 도로와 연결하기 위해서 지금의 자유의 다리를 동쪽에 있는 상행선 철로쪽으로 가설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야만 문산까지 철로를 복구하는 공사 없이 국도1호선과 바로 연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지금처럼 자유의 다리를 상행선 방향으로 틀어서 연결한 것에 대한 기록은 찿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나름대로 현재의 도로망 구조나 당시 상황으로 가설을 설정해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자유의 다리를 지금의 목교만을 지칭하게 된 이유도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일부 의견처럼 포로교환 당시 임진강을 횡단하는 가설교를 이용하여 포로가 한국군에게 인계되었거나 복구된 철교가 기존의 마을명을 따라 독개다리라고 불리워져 지금의 자유의 다리만을 지칭하지 않았나 추측 해 볼 수 있다.

 

여러가지 상황을 분석하면 임진강을 횡단하는 가설교는 1951년 하반기부터 설치 또는 사용중에 있었으며 가설교가 홍수 등의 위험으로 유실될 것을 우려하여 임진강 철교를 복구한 것으로 보이고 어느 시기까지는 복구된 철교와 가설교와 병행하여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최근 논란이되었던 자유의 다리 위치는 복구된 철교와 가설교의 병행 사용에 따른 혼선에서 발생된 것으로 보는 것이 당시의 복구 기록을 중심으로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기록으로 보아 자유의 다리는 현재의 철교를 포함하여 전체 구간이 자유의 다리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임진강 철교를 포함하여 자유의 다리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역사적인 면이나 기록에 따르면 철교와 목교 전체를 자유의 다리라고 명명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임진강 철교는 1904년 3월 12일에 용산~개성간 노반공사가 착수되어 1905년 4월 28일에 준공되었으며 청천강 철교가 완성되면서 1906년 3월25일부터 용산~신의주간 전 구간에 열차가 운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확대됨에 따라 일제는 1938년부터 대륙 침략을 위한 군수 물자와 병력을 수송하기 위해 경의선 복선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때 임진강을 횡단하는 철교가 상하행선 2개로 되었다.

 

임진강 철교를 통과하여 운행되던 경의선은 남북이 38도선으로 나누어진 1945년 9월11일에 중단되었고 한국의 신탁통치안을 협의하던 미.소공동위원회의 연락장교단 수송을 위해 1947년 8월 9일에 서울-평양간 임시열차가 운행된 적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자유의 다리를 지키기 위한 문산지역 전투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자세하게 남아 있다.

 

전투사에 따르면 당시 이곳을 방어하던 육군 1사단 11연대(연대장 대령 최경록)은 25일 11:00~15:00 사이에 열차를 이용 문산으로 이동하여 마정리 1번 도로 좌우측으로 방어를 시작하였다.

 

제11연대장은 개성지구에 있던 제12연대 일부 병력이 임진강철교를 통해 철수한 상황을 확인한 후 사단장에게 철교 폭파를 건의하여 사단공병이 폭약을 장전하고 점화하였지만 불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아군의 임진강철교 폭파기도가 실패한 것을 확인한 적 제6사단은 26일 이른 새벽에 임진강철교를 통해 전차 5대를 앞세운 보·전·포 협동부대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와 맞선 제 11연대는 임진강철교로부터 남쪽으로 종심 깊게 편성한 방어지대에서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전차와 대결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과 방법이 없어 문산 남쪽 구릉지대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적은 평양-개성-서울로 연결된 가장 양호한 국도1호인 경의도로를 주병참선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임진강 철교에 기차가 다시 운행된 것은 한국전쟁시 평양을 탈환하고 1950년 11월 12일 서울-대동강 구간에 열차가 운행되었다. 그 해 10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연합군이 다급하게 후퇴를 하면서 1950년 12월 31일 22:00경에 미군이 장단역에 정차된 기관차를 총격으로 거부하고 후퇴하였으며 임진강 철교도 이 당시에 폭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전에는 서울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5월 2일부터 5월 5일까지 임진강철교를 이용하여 평양을 방문하여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으며, 북한의 김영주 부장을 대신한 박성철 제2부수상도 1972년 5월 29일부터 6월1일까지 이 철교를 이용하여 통일로로 서울을 방문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다.

보낸 사람 근대문화

 

1998년에 통일대교가 개통되기 전 까지는 이 자유의 다리 1개 차선으로 차량이 교대로 통행하였으며 민통선 지역으로 들어 가려는 차량이 임진각 건물 앞에 줄을 이어 대기하기도 하였다.
1990년대에 남북이 화해와 협력 분위기로 조성되면서 1992년에는 남북 기본합의서에 남북철도 연결이 명시되었다.

 

2000년 7월 1차 남북장관급 회담때에는 철도 연결에 합의하고 그해 9월에 임진각에서 경의선 복원 기공식이 개최되었다. 그 후 2002년 9월 경의선 연결공사가 착수되고 2003년 6월 군사분계선 철로가 연결되었으나 핵문제 등 북미 관계 악화로 무산되었다.

 

남북은 여러가지 우여곡절 끝에 2007년 5월 군사보장 합의서를 체결하면서 운행이 중단된지 56년만에 열차를 시험운행 하였고 7개월 후 2007. 12. 11일에는 개성공단의 자재와 생산 물량의 수송을 위해 문산-봉동간 화물열차 운행을 시작하므로서 경의선이 운행이 재개되었다.

 

자유의 다리는 군사적이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다리이다. 그 다리를 통하여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상징성은 충분하다. 민족의 수 많은 사연이 담겨있는 그 다리를 ‘자유의 다리’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자유의 다리와 관련한 진실이 밝혀 질 수 있도록 전문가의 고증과 연구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 이외에도 파주와 관련된 많은 역사가 사실대로 정리될 수 있도록 문헌의 보존과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자료 출처 >

 

  • 한국철도백년사 ( 2005. 한국철도시설공사)
  • 왓스온 :http://www.whatsonkorea.com/korean/history.ph?uid=489&se=list&page=38&keyfield=&key=&wk_code=
  • 전쟁기념관 : http://ki.warmemo.co.kr:8101/warmemo/jsp/data/view.jsp?type=2&pkey=625CB00002
  • 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donBoardView.do?pp=10&depth1_code=8&depth2_code=3&depth3_code=1&depth4_code=0&depth5_code=0&db=73&no=91392&page=225
  • 통일뉴스 :가설교를 자유의 다리로 주장 :http://www.tongilnews.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76054


추가댓글
6.25 당시 파주출신이면서 자유신문의 종군기자였던 윤경현 옹이 전화로 자유의 다리에 대하여 증언한 내용을 댓글로 올립니다. 판문점에서 교환된 포로는 임진강철교 북단에서 하차하여 철교를 도보로 건너 왔다. 일제시대부터 임진강 철교는 기차만 통행하고 독개다리라는 목교가 있어 사람이 이용했다고 한다.자유의 다리는 대성동을 자유의 마을로 부른것처럼 포로교환 이전부터 임진강 철교를 자유의 다리라고 불렀다. 이 당시 유엔사에 파견된 최덕균 중령이 윤경현 기자가 제안한 명칭을 받아 들였다고 한다
< 2009.5.11  이기상,  파주저널 기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