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의 역사가 서린 감악산의 인물들

감악산에는 조선중기 의적이라고 불리던 임꺽정이 관군을 피해 숨어 있던 굴이 있어 임꺽정봉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아마 임꺽정이 양주 출신이라 황해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산이 깊고 쉽게 피할 수 가 있어 감악산으로 피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임꺽정 말고도 이 곳 감악산으로 숨으려는 사람이 역사에 또 등장한다. 그 중 고려시대 김부식의 아들인 김돈중과 조선 개국시 태조가 중용하려던 남을진이다.

김돈중은 1170년 18대 고려 의종때 정중부 무신난의 단초를 제공하였던 인물로 감악산으로 피신왔다가 노비의 신고로 붙잡혀 살해 당했다.

남을진은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사천(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하패리)으로 은거하여 조선이 개국된 후 수차에 걸친 태조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그의 절의에 감복한 태조가 사천백에 봉하자 더 깊숙히 감악산에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일생을 살았다.

감악산은 이 이외에도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설화가 전해지며, 그를 산신으로 숭앙하는 풍습이 전승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도 “감악산사는 민간에 전하기를 신라가당나라의 설인귀를 산신으로 삼고 있다(紺岳祠諺傳 新羅以唐薛仁貴爲山神)”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마 감악산이 산세가 높고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의 지배권을 다투던 혈투장으로 거란침입과 최근 한국전쟁시까지에도 치열한 전투가 치루어져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여 이 곳이 오래 기억되기 때문일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중 어느 구절에 “서울에서 동북쪽으로 설마현(雪馬峴)을 넘어 수십리 지점에 적성현이 있는데 동쪽으론 감악산을 의지하고, 서쪽으론 장단부 큰 강을 누른다. 지역이 궁벽지고 좁은 관계로 백성의 삶이 貧殘하다.” 라 적혀있다 한다. 그만큼 이곳은 오지 중 오지로 전쟁터가 아니라면 쓸모가 거의 없는 땅이다

감악산은 백두대간이 금강산을 향해 달리다가 분수령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한북정맥이 양주에서 갈라져 적성 쪽으로 뻗은 산줄기이다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군 남면의 경계에 위치한 해발 675m 산으로 삼국시대부터 명산으로 알려져 왔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감박산으로 더 잘 알려져 있고, 《고려사》나 《동국여지승람》에는 감악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조선시대 도성을 중심으로 북악, 송악, 관악, 심악 등과 함께 경기 오악의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감악산 정상에는 아직도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과거나 현재나 감악산은 아직도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감악산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통하여 파주가 한반도 역사의 중심지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요즘에도 주말에 감악산을 찾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누구나 은둔을 꿈 꾼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감악산으로 피신하여 숨어 살았던 역사 인물들에 대한 소개를 옮긴다.

1.임꺽정 (?~1562)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골 백정인 임돌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놈’인데, 부모를 걱정시킨다고 ‘걱정’이라고 하던 것이 ‘꺽정’으로 되었다.
꺽정은 열 살 때 갖바치의 아들과 결혼한 누이를 따라 서울로 와서 갖바치와 같이 살면서 그에게 글을 배운다. 양주팔은 본래 학식이 높은 데다 묘향산에 가서 도인 이천년에게 천문 지리와 음양 술수를 배우고 와서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학문에 두루 통달하여 당대의 명망 높은 조광조 등과 교유한다. 꺽정이는 글공부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검술을 익힌다. 이 때 박유복과 이봉학은 임꺽정과 의형제가 된다.

갖바치는 기묘사화를 보고 나서 혼란스런 정국을 예견하고 임꺽정을 데리고 전국을 유랑한다. 꺽정은 곳곳에서 백성들의 고난에 찬 삶의 모습들을 접하게 되며 백두산에 가서 황천왕동이 남매를 만나고 황천동이의 누이 운총과 결혼하여 양주로 돌아와 아들 백손을 낳고 평범하게 산다.

그러나 임꺽정은 서른 다섯 살이 되자 여러 도적과 합세하여 봉산 황주 도적이 되며, 38세 때, 6명의 산적 두령과 함께 의형제 결의를 맺는다. 그들은 황해도 산적들의 소굴인 청석골을 차지해서 도적질을 하면서 평산에서 관군과 접전해서 승리한다. 그러는 가운데 한양 나들이를 갔다가 여러 첩을 맞아하여 방탕하게 지낸다.

그러다 다시 청석골로 돌아왔는데, 부하와 부인이 관군에게 잡히는 위기를 당한다. 전옥을 파괴하고 부하와 부인을 구출한 꺽정은 위험을 느끼고 소굴을 여러 군데로 분산시킨다. 그 해 관군과의 접전을 벌인 평산 싸움에서 관군이 패하고 임꺽정이 승리한다

1559년(명종 14)에는 개성(開城)까지 쳐들어가 도둑질을 하자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의 소굴을 소탕하러 갔다가 오히려 살해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8월에는 일당이 서울까지 출몰하였다가 장통방(長通坊, 지금의 종로 2가 부근)에서 아내와 부하들이 체포되었고, 12월에 서울 전옥서에 갇힌 아내와 부하들을 구출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던 중 숭례문 밖에서 참모 서림(徐林)이 체포되었고, 이어 황해도에서 형 가도치(加都致)가 순경사 이사증(李思曾)에게 체포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1561년에는 임꺽정 일당을 잡기 위해 경기도 · 강원도 · 평안도 · 함경도 · 황해도의 군졸들이 대거 동원되어 소탕작전을 펼쳤다. 이들이 약간이라도 의심가는 사람이면 모두 잡아 가두어 심문을 벌이면서 민심이 흉흉해지고 원망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정부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도적 체포를 일임하고 다른 군사들은 돌아가도록 조치하였다. 1562년 정월에는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이 구월산으로 도망간 임꺽정을 추격하여 체포하였고,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하였다.

2.남을진

남을진은 고려 충렬왕때 의령군으로 봉해진 의령남씨 1세조 남군보의 증손으로서 을번(乙蕃), 을진(乙珍), 을경(乙敬) 3형제가 유명했다

고려조에서 밀직부사를 지냈던 을번은 조선개국 후에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 그의아들 재(在)는 초명이 겸(謙)이었으나 공신으로 봉해지는것을 사면하려고 지방으로 피신하자 태조가 그를 찾으려고 애쓴끝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 이름을 재(在)로 사명했다고 하며, 임금이 내려준 이름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자(字)를 경지(敬之)라 했다 한다

아우 을진은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사천(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하패리)으로 은거하여 조선이 개국된 후 수차에 걸친 태조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그의 절의에 감복한 태조가 사천백에 봉하자 더 깊숙히 감악산에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며 일생을 마치니 세상 사람들은 그가 거처한 자리를 남선굴(南仙窟)이라 불렀다.

3.김돈중

김돈중이 내시직에 있을 때 정중부의 수염을 불태워 그의 원한을 샀던 일은 유명하다. 자식뻘밖에 안 되는 새파란 놈에게 무인의 자랑인 수염이 불태워졌으니 이가 갈릴 만하다. 이 원한 때문에 무신란을 일으켰다고도 한다. 그러나 수염이 불태워진 것은 무신란 26년 전의 일이었다.

그 세월을 못 잊어 목숨을 건 난을 일으킬 리는 없다. 수염 사건이 아니라 김돈중은 무신란 3년 전인 의종 21년에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관등제를 하던 날 밤 의종 일행은 봉은사로 갔다가 관풍루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김돈중이 탔던 말은 조련도 덜 된데다 징과 북 치는 소리에 놀라서 뛰다가 어느 기병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 바람에 기병의 화살통에서 화살이 튀어나가 왕이 타고 가던 가마 옆에 떨어졌다. 깜짝 놀란 의종은 급히 궁으로 돌아와서는 범인 색출에 나섰다.

시내 각처에 방이 붙고 현상금이 걸렸다. 놀라고 겁이 난 김돈중은 사실을 고하지 못했다. 왕의 서슬에 무고한 이들이 체포되었다. 왕의 동생 대녕후 경의 집 하인이 지목돼 죽음을 당했다. 또한 호위병들이 태만하다 하여 견룡, 순검, 지유 등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격무에 시달리던 무신들 14명이 귀양 갔다. 무신들이 원한에 사무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신들의 집단적 반란의 기운은 이때 더욱 증폭됐을 것이다.

김돈중은 앞에서 기술된 환관과 내시처럼 권세 자랑은 하지 않았지만 그 폐해는 더욱 컸던 것이다. 앞서 정함이 합문지후에 임명됐을 때는 그도 문벌귀족이라고(김부식 집안은 고려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문벌귀족이었다.) 고신에 서명하지 않아 직급이 떨어지기도 했다.

시어사에서 호부원외랑으로 강직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아버지 김부식이 창건한 관란사를 중수하고 왕을 위해 복을 빌었다. 물론 소문을 냈다. 의종이 관란사를 찾았을 때는 근처의 주민을 강제 동원해 소나무, 잣나무, 삼나무, 젓나무 등 기이한 화초를 이식하고 왕이 휴식할 이궁까지 신축하였다. 섬돌은 모두 기괴한 돌로 만들었다.

장막과 그릇, 집이 모두 사치스럽고 진기한 것이었다. 강제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의 고초가 심했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김돈중이 무신들에게 곱게 보일 리 없었다.무신란 직후 그는 감악산으로 도망갔지만 집종의 밀고로 붙잡혀 살해당했다.

<2009.9.27, 이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