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백년 역사의 오류가 있는 고려벽화묘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 끝자락에서 세월을 보내는 아쉬움과 함께 역사의 발자취를 찾는다는 설레임 속에서  간간히 떨어지는 빗방울 맞으며 국도37호선을 달린다.

 

작년 12월에 대법원에서는 청주한씨문열공파종중의 분묘기지권 확인에 관한 항소를 기각 판결하므로서 그동안 청주한씨 한상질 묘로 관리해오던 고려벽화묘가 안동권씨창화공의 묘소로 바뀌게 되었다.


내가 서곡리 고려벽화묘를 답사하게 된 것은 중등 교과서에서 벽화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사진과 권씨 종중으로부터 대법원의 판결문의 사본을 받고서부터이다.

 

6백여년 지난 후에 발굴된 묘지 안에서 묘의 주인공의 일생을 기록한 묘지석이 발견되므로서 2개의 묘중 앞쪽에 있는 묘가 권준의 묘이고 한상질의 조상묘는 뒷편에 있는 것으로 판결이 되었으니 청주한씨 종중은 세상을 뒤집어 놓는 듯한 심정이 되었을 것이다.


그 묘지석은 분묘 외부에서 발굴되었으나 1980년경 청주한씨종중에서 분묘내부 입구에서 발견하였었다고 증언하였고 묘지 내부에서 발견된 석편을 합쳐 본 결과 ‘증익창화공묘’란 제액 아래 ‘유원고구려국삼한벽산공신 삼중대광 길창부원군 권공묘지명병서’라고 기재 되어있고 권준의 행적과  증조부 및 자녀, 손에 이르기까지 가계보가 기록이 되어 있었다.


나는 묘의 주인공이 바뀌게 된 상황이 매우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동안 바쁜일로 중지했던 답사를 다시 시작하면서 추석 기간중에 발굴 보고서와 판결문에 나온 인물과 사건들을 인터넷에서 찾아 보았다.


안동권씨 홈페이지와 규장각, 여러 가지 블로그를 찾아 보니 6백년만에 묘지 주인공이 바뀔 수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가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마저도 반전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대충의 줄거리를 정리해본다.


우선 문열공 한상질은 1392년 7월에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국호를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과 ‘조선’이라는 두가지 국호를 갖고 명나라에 승인받기 위해서 자청하여 파견가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한 공로로 농토50결과 경상도 관찰출척사가 된 인물이다.


문열공 한상질의 부인은 권씨로 고려벽화묘 주인공인 권준의 둘째아들 권적의 딸로서 한상질은 손주 사위가 되며 권준의 큰아들인 권염은 권용을 낳았으며 권염은 이 사건의 당사자인 아들 권진(權瑨)이 있었다.


권진은 공민왕때 귀족들의 미소년 자제로 구성되어 왕위를 보좌하는 일명 자제위의 일원으로 공민왕이 총애하는 인물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정신적으로 피패되어 왕비와 궁녀 그리고 자제위와 문란한 성 관계를 가지므로서 자제위중 홍륜이 왕비인 익비를 임신시키게 되었다.


이 사실을 내시인 최만생이 공민왕에게 밀고를 하였으나 공민왕은 왕비를 임신시킨 홍륜과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를 죽이겠다고 말하자 내시와 홍륜은 공민왕 침소에서 왕을 시해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권진은 공모자로 처참되고 그의 아버지도 유배지에서 살해되었다.


이에따라 1374년부터 권진의 형 권적(權適)의 사위인 청주 한씨  문경공(文敬公)  한수(韓脩)가 몰락한 처가를 수습해 권진의 증조 할아버지인 권준(權準)의 제사를 잇게 된 것이다.


권준은 생전에 현재 묘지가 있는 곳을 장지로 유언하였고 이곳은 당시 폐사된 자효사(慈孝寺) 서쪽 언덕으로 권준이 중수하였었다. 자효사는 원래 창화이공(창화는 호이고 성명 이모) 또는 이창화가 창건하였는데 권준이 생전에 이창화를 흠모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스스로가 후신이라고 생각하였다.


권준은 할아버지 권단 이래로 명문가가 되었으며 당시 권력과 재력을 가진 자로서 충숙왕이 권준의 집을 보고 국왕으로서도 미치지 못하다는 한탄을 하였으며 가속들이 죄를 지어도 처벌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 묘지는 현재 파주시 진동면 서곡리 산 112 임야 19천평 중 20여평 정도가 묘역으로 1918년  청주한씨 창화공파 종중인 한창현의 명의로 있다가 1991년 종중의 명의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발굴 이후 파주시에서는 2001년 12월 21일에 향토 문화재 제16호로 지정하였으며 현재 종중에서는 국가문화재로 승격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군막사가 있었던 앞 도로를 지나자 마자 폭우로 길이 패여 있어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었으나 잡초가 무성한 쪽으로 바퀴 한 쪽을 걸치고서 계속 진행을 하였고 10여분 후에 파평면 장파리의 리비교로 이어지는 삼거리에서 스토리 미군사격장 쪽의 포장도로를 달렸다.


2㎞ 정도 포장도로를 달린 후 비슷한 산자락의 두 번째에서 좌회전하여 농경로 막 들어서면 삼거리가 나오고 왼쪽 길로 차를 몰았다.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농로로 1㎞ 정도 올라가자 왼쪽 편으로 70년대 군대에서 만들었음직한 문화재 안내판이 나타난다.


오른 쪽으로 야트막 언덕에 묘지가 보이면서 좌우에는 크지 않은 연못이 있으며 그곳에서 나는  물 흐르는 소리와 까마귀의 비행은 서곡리 창화동의 자연경관을 생기있게 만들어  주어서 맘이 즐거워 졌다.


추석 성묘를 위하여 입구에서부터 묘지까지 삭초 작업은 깨꿋하게 되어 있었으나  삭초 작업을 안동권씨와 청주한씨 종중 중에 어느 종중이 하였는지 궁금하였다.


언덕을 30m 정도 올라 가면 돌 계단이 있고 그 위에 고려벽화묘가 화려하지 않은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발굴 이전에 세워진 생둥 맞은 한상질의 묘비와 상석, 그리고  3백여년전에 만들어졌다는 비석이 공존하고 있다.


또 고려 벽화묘 네 귀퉁이에 보통  석수가 1마리씩 세워 있어야 하는데 북쪽 동편에는 유실되어 빈자리로 남아 있었고 동쪽에는 장명등1기가 세워져 있으나 제대로 조립된 장명등이 아니라는 것을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서쪽편에는 문인석상이 얼굴, 몸통, 다리부분만 부조한 것으로 형상만 타나낸 인물상으로  서있는데 머리 윗부분은 낮은 관 모양을 표현한 듯 이마 위에 음각선을 돌려져 있고 비교적 큰코, 작은 입등이 간략화되어 기교는 찾아보기 어렵다.


경남 거창에 둔곡리고려벽화묘에 있는 문인석상과 비슷하여 고려 공민왕를인 현릉의 문인상과 함게 비슷한 시대의 양식 및 기법을 갖추고 있다. 그 고려벽화묘는 뒷 편 가까이에 석축 위에는 한상질의 부인들의 묘라고 불리는 묘가 단아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산소 날개 없이 바로 언덕 정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고려벽화묘와 한상질 부인들의 묘는 6백년전에 세워진 위치에서 석수나 장명등은 부분적으로 움직여져 설치된 것으로 보나 문인석과 봉문의 위치는 변화가 없었을 것이라고 발굴단은 보고있다.


이러한 형태의 고려 벽화묘는 주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중심으로 경기도 지역에 분포 되어 있으며 구조상 다듬은 판석이나 사각 돌을 벽재로 사용하고, 넓은 판석으로 덮개(천정석)로한 무덤으로 벽화는 검정색으로 윤곽을 잡은 후 자연광물성 안료로 12지신을 주제로 채색되어 당시 의복사 및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비가 올려는지 가을이 짙게 묻은 빗방울이 묘지 주변의 상수리 나무 잎을 흔들고 이름모를 새의 날 개짓이 심상치가 않아 서둘러 묘지를 내려 온다. 내려 오면서 50m도 채 내려오기 전 좌측편에는 창화사 절터 인듯한 곳에 콩밭이 있다. 인가도 없는 곳에서 콩밭을 지키던 백구는 괜하게 짖어되며 나를 쫓으려한다.

 

찾아 올때의 길이 하도 험하여 나는 동파마을 방향으로 방향을 잡고 6백년간의 오류가 가을로 채색 되어가는 그곳을 떠났다.

< 2005.9.24, 이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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