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을 밀어 낸 소령원을 찾아

봄 볕이 화사한 토요일에 조선시대 21대 영조대왕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제사가 광탄면 영장리 소령원에서 있었다. 작년까지는 전주이씨 종친회 파주분원에서 제례를 맡아서 봉향하였지만, 올해부터는 전주이씨대동 종약원에서 제례를 지내기로 하였다고 한다.


보통 유교적인 관습에 따라 일반인의 제사는 자시(밤 11시 ~ 새벽1시)에 지내고 정승 이상의 벼슬을 한 계층만 낮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소령원은 숙종의 후궁인 숙빈최씨가 1718년(숙종44년) 3월 9일(?19일)에 49세로 별세하여 당시 양주땅 이었던 이곳에 장사를 지냈다.


숙빈 최씨는 숙종 비 인현왕후의 궁인이었다. 인현왕후가 폐비되어 사가에 나가 있을 때, 숙종이 우연히 밤에 후원을 거닐다가 밤중에 부엌에서 음식을 마련하는 최씨를 발견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숙종이 물어서, 인현왕후의 궁녀라는 것과 내일이 인현왕후 생일이어서 아침밥 준비를 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숙종이 “인현왕후가 죄가 없느냐?”고 물었다. 이에 최씨는 “죄의 유무를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저를 따라오셔서 보시면 알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곧 숙종이 최씨를 따라 토굴 속을 들여다보니, 벽에 인현왕후의 화상을 붙이고 장희빈이 활로 쏘고 있었다.


그 길로 돌아와 숙종은 최씨에게 동침을 요구했다. 최씨가 “옛 주인을 밖에 내보내 놓고 어찌 감히 임금을 모시겠습니까?” 하면서 거절했다. 그래서 숙종은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날 밤 동침했다.


하루는 숙종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황룡이 큰항아리 밑에 치어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꿈을 깬 숙종이 뒤뜰에 나가 보니 과연 큰항아리가 엎어져 있기에, 뒤집게 하니 최씨가 그 속에 갇혀 거의 기진한 상태였다. .


장희빈이 질투해 한 짓이었고, 이 때 최씨는 임신한 상태였다. 곧 침전에 데려다가 깨어나게 했고, 이듬해 1694년에 아들이 태어났다.(이 아이가 뒤에 영조 임금임.) 그리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었다가 얼마 후 사망하고, 장희빈은 저주 사건이 탄로되어 사사(賜死)되었다. (김현룡, 한국문헌설화3, 건대출판부, 1998. 69-70쪽.)


이와 같이 숙빈최씨는 의리와 책임을 다하는 성품으로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며 7세에 궁에 들어와서 궁녀로서의 최고의 지위인 숙빈까지 오르게 된 행운아로 요즈음 TV드라마에서 평범한 여자가 재벌가 아들의 애인이 되는 신분상승의 전형적인 모델이 된다.

영조는 1694년(숙종 20년) 9월 13일 창덕궁에서 숙빈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복 형인 경종(20대왕)이 병약하고 아들이 없어 세자로 책봉되어 연잉군이 되었고 숙빈최씨가 죽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한 효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자로 책봉된 연잉군은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위험을 느끼고 있어 시묘살이를 이유로 소령원 깊은 산중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을에 전하는 얘기로는 영조가 시묘 살이를 하는 중에도 자객의 기습이 몇 차례나 있었으나, 그때마다 동네 개들이 일제히 짖어 위험을 알렸고, 마을에 장사가 숨어 지내다 자객들을 물리치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조는 이 마을 사람들을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고 한다.


영조대왕은 즉위하자 죽은 후에도 왕비가 될 수 없는 어머니를 위해 최초로 육상묘(毓祥廟)를 건립해(현재 서울 종로구 궁정동 1-1 칠궁(七宮)) 후궁으로 왕의 어머니가 된 신위를 모시는 곳을 만들었고,  소령원 묘소 동남편에 친필 비각을 4곳에다 세웠다고 하며 명복을 빌기 위하여 보광사를 중수하는 한편 어실각을 짓고 매년 백중날 절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파주에는 황희 정승, 율곡 선생, 윤관 장군 등의 인물들이 있어, 제향 지내는 것을 볼기회가 있었지만 이곳 제향은 왕실의 제례의 규모나 복장, 제기와 형식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제향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수복방에서 헌관목록 작성해서 문밖에 게시하고 이 곳에서 헌관(제사 지내는 3인)과 집사자 들이 옷을 갈아 입은 후 축함을 들고 대열을 맞추어 입장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제례는 1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옛날에는 상당히 엄숙한 행사로 진행되어 왕실의 정통을 과시하였을것이다. 또한 유교적인 전통의 의례가 조선시대의 정치가와 관료에게 뿌리 깊은 계급사회 구조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숙빈 최씨 제사가 끝나면 영조의 후궁인 정빈이씨의 묘인 수길원에서 또 다시 제사를 지내기로 되어있는데, 벌써 오후12시가 넘어가고 있다.

재실은 일반과는 달리 T자형태로 되어 있고 뒷문을 열어 멀리 묘지를 재실을 통해서 바라보며 제례를 지내게 된다. 재실 앞에서 절을 하는 참배객에게는 저절로 숭배의 마음을 갖게 한다.

 제례가 끝나자 잘 관리된 잔디와 100여년 넘은 전나무 옆을 걸어서 숙빈최씨의 묘지로 올라 갔다. 묘지는 재실에서 100여m 동산 8부 능선쯤에 위치하고 아담한 담장 앞으로 봉분과 호랑이 모양의 석호, 양모양의 석양이 옆으로 설치되어 있고, 봉분 정면에는 비석, 상석, 향로석, 장명등과 그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 석마가 대칭으로 세워져 있다.


봉분 주위의 석물들은 3백여년의 풍상을 알아 볼 수 있도록  곰팡이가 무성하고 주변의 오래된 소나무와 벚꽃 나무는 봉분의 주인인 숙빈최씨의 단아함을 말해 주는 듯 하며  옛 전통의 정원을 보는 착각을 느끼게 한다.


봉분 바로 앞에서 재실 쪽을 바라보면 잔디 위로 나타나는 능선의 모양과 양 옆으로 자란 소나무와 전나무가 황금분할의 조화로 어머니의 품안에 안긴 것처럼 편안함 마음이 든다.


봉분에서 비각을 보고 이 곳 재실 옆에 있는 약수터에 내려가서 물을 마셨다. 약수터 위쪽으로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전혀 인공적인 시설이 없어 물맛은 무색무취의 가장 좋은 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나무가 빽빽한 입구를 좀 지나면 왼쪽으로 수길원이 있고, 30여m만 지나면 오른편으로 굳게 닫힌 비각이 나타나고  이곳에는 영조가 생모를 애뜻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친필로 쓴 비석이 있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에 숙빈최씨의 제사날을 맞추어 답사를 할 수 있었던 운 좋은 하루였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제사를 통하여 죽은 사람들의 좋은 점을 기억하면서 자신을 돌아 보는 기회가 되듯이  문화유산의 답사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좋은 방법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 2005.5.3, 이기상>